[비신자 그룹2] (11)재앙과 신앙

“목사님, 이번에 큰 지진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예, 안타깝게도 너무 많은 피해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무슨 종교를 믿습니까?”
무슨 의도의 질문인지 이해가 됐다.
혹시 기독교 국가이면 ‘왜 하나님이 그곳에 큰 지진을 일으켜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한 것이냐?’라는 질문이 이어질 것 같았다.

속으로 긴장했지만 태연하게 대답을 시작했다.
“지진이 한 나라에만 일어난 게 아니라 두 나라의 접경지대에 일어났습니다. 하나는 튀르키예이고 하나는 시리아입니다. 튀르키예는 옛날 터키인데, 터키 아시죠?”
“예. 알죠. 그런데 나라 이름도 바꿉니까?”
“흔한 일은 아닌데 국제사회에서 ‘터키’ 발음이 영어로 ‘칠면조’와 같고 ‘겁쟁이’라는 의미라서 자기들 말로 ‘터키인의 땅’과 ‘용감한’이란 의미를 가진 ‘튀르키예’로 바꿨다고 합니다. 그런데 튀르키예와 시리아는 이슬람교를 믿습니다.”
“아… 그래요? 거기는 기독교인이 없습니까?”
“대부분은 이슬람교인데 기독교인도 소수 있겠지요. 당연히 사고를 당한 사람들이 대부분 이슬람교를 믿겠지만 기독교인도 있을 겁니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모든 자연을 다스린다고 믿지만 지진이나 자연재앙을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만 내린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믿는 사람들을 지키지 않는다는 건가?’라는 표정으로 나를 봤다.

복잡하거나 의도가 있는 질문을 받을 땐 그냥 있는 대로, 대신 질문을 존중하는 태도로 대답하는 것이 상책이다.
“성경에 ‘하나님은 의인과 악인에게 차별없이 햇빛과 비를 주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독교인에게만 햇빛과 비를 주신다면 하나님을 안믿는 사람이 생기겠습니까?”
“아니요. 다 하나님 믿겠지요.”
“그러면 믿는 사람들이 많아서 하나님 기분이 좋으실까요?”
“기분은 안좋을 것 같은데요.”
“제가 하나님이라도 기분이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건 자발적이고 진정성 있는 마음이 아니라 강요에 가까운 거죠. 하나님은 그렇게 믿는 건 원치 않으십니다. ‘억지 사랑’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재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재앙도 차별없이 주십니다. 전쟁이 생기면 기독교인도 죽고 비기독교인도 죽습니다. 가뭄이 오면 기독교인의 농작물도 죽고, 비기독교인의 농작물도 죽습니다. 전염병이 돌면 기독교인도 걸리고 비기독교인도 걸립니다. 제가 목사지만 작년에 코로나 걸려서 잠도 못자고 먹지도 못하고 진짜 고생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을 믿습니까? 종교를 믿는 건 보호 받으려고 믿는 것 아닌가요?”
“그렇죠. 처음엔 그렇게 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경을 공부하고, 하나님을 알게 되고,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세상적으로 잘되거나 재앙을 당하는 일들과 관계없이 하나님을 믿는 일이 생깁니다.”
“어떻게요?”
“그게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거죠. 사람도 처음엔 어떤 부분이 좋아서 사랑했다가 나중엔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좋아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렇죠.”
‘사랑’이란 말 자체에는 에너지가 있는 모양이다.
60대 후반의 분들인데 표정이 달라진다.

“그런데 사랑은 하나님이 먼저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사람은 원래 처벌해야 할 죄인이었습니다. 더 엄밀히 말하면 사형수요. 하나님 명령도 어기고 자기가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으니 대역죄인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이쁜 구석이 하나도 없는 사람을 사랑하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리고 결심대로 사랑하셨습니다.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인간에게 계속 ‘내 말 좀 들어달라’고 설득하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외아들 예수님을 대신 죽이고 우리를 용서하신 것입니다. 그 사랑을 마음으로 깨닫게 되면 길흉에 따라 믿음이 왔다갔다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재앙이 오면 무섭고 싫잖아요.”
“저도 재앙이 무섭고, 춥고 배고픈 건 싫습니다. 너무 아프고 고통스러우면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이왕이면 재앙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원치 않는 재앙이 닥쳐도 하나님이 살아계신 건 부인할 수 없고, 하나님이 먼저 사랑해 주신 것을 생각합니다. 이게 기독교의 신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