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교회를 잘 믿는데도 너무 힘든 일을 당하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아는 사람 중에 교회를 참 열심히 다니는 사람인데 보통 사람들이 당하지 않는 어려운 일을 당한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어려움을 당하셨습니까?”
“좀 오래된 일인데요. 할머니가 손주를 업고 나갔다가 감기가 걸린 것 같아서 주사를 맞았는데 그만 식물인간같이 되고 말았습니다. 할머니는 평생 죄책감에 시달렸고, 그 부모도 말못할 고생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좋은 일이 생겨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집에는 왜 그런 일이 생겼습니까?”
“아는 분이 너무도 어려운 일을 당하셨네요. 지금 같으면 혹시 의료 사고인지 문제를 제기해 보고 치료 방법을 찾아볼 수도 있을텐데 옛날에는 가끔씩 그런 안타까운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은 교회를 다니지 않게 되었나요?”
“아니요. 여전히 교회는 다니지만 고생이 너무 심한 것 같아서요.”
“그분들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이 있으셔서 그러네요. 일단 예상치 못한 불행한 일을 겪으며 사는 것이 인생인 것 같습니다. 살다 보면 그냥 똥 밟았다 생각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소소한 일도 있지만 집안의 뿌리를 흔들고 오랜 시간 동안 해결할 수 없는 큰 문제를 겪기도 합니다. 그중에 가족이 큰 사고를 당하거나 중병에 걸리면 정말 힘들게 됩니다. 이런 일은 기독교인도 예외없이 모두 겪으며 삽니다. 기독교인도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인간이니까요. 만약 기독교인은 아무 불행도 없이 산다고 소문나면 누가 교회에 다니지 않겠습니까? 아마 번호표 뽑고 기다려야 할 겁니다. 그런데 이건 기독교가 아닙니다. 자기는 여전히 자기가 살고 싶은 대로 살면서 다만 액운을 피하기 위해 신의 도움을 구하는 건 미신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교회를 다녀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른 기독교 신앙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런가요? 그냥 교회만 다닌다고 기독교가 되는 게 아니네요.”
“혹시 그분들이 어려운 일을 겪고, 그 힘든 시간이 오래되니까 교회를 떠나셨나요?”
“아니요. 여전히 잘 다니더라고요?”
“죽지 못해 사시던가요?”
“아니요. 그냥 보통으로 살던데요.”
“아마 그분들이 그냥 보통으로 살 수 있는 힘을 교회에서 얻으셨을 겁니다. 자식이 그런 일을 당했는데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멀쩡하게 살 수 있는 부모가 어디있겠습니까? 아마 그분들은 아무도 모르게 교회에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마음에 답답하고 속상한 것들을 하나님께 기도했을 겁니다.”
“열심히 믿는 사람들이니까 그랬겠지요.”
“그런데 아마 그분들이 그렇게 어려운 일을 겪은 이후로 그분들이 새롭게 만나게 된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그분들처럼 가족이나 자식이 병을 앓거나 사고를 당해서 누워있는 사람들 말이죠.”
“아마 있겠지요.”
“그분들은 그 큰 어려움을 당하고 자식 병 수발하고 인내하며 살아가는 모습으로 주변 분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좋은 영향을 미치고 계실 것입니다.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 주변에는 별별 일들을 당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맞습니다. 정말 힘든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희 집안에도 있고요.”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들은 위로가 필요할텐데요, 누구의 위로가 가장 좋을까요? 아무 어려움도 없고 행복하게 잘 사는 지위가 높은 사람이 와서 위로해 주면 위로가 될까요?”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비슷한 어려움을 겪으며 그 아픔과 답답함을 공감하는 사람의 위로가 마음에 다가올 겁니다.”
“그럴 것 같습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19세기에 다미엔이라는 선교사님이 있었습니다. 이분이 한센병 환자들만 격리해서 수용한 섬에 전도를 하러 갔습니다. 어쩌다가 ‘너는 건강하니까 하나님 열심히 찾아라. 우리같이 문둥병에 걸려서 몸이 썩어져 나가는데 무슨 하나님이고, 무슨 소망이 있냐?’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런 분위기인데 전도가 되겠습니까?”
“안되겠는데요?”
“그러면 포기해야 할까요?”
“열심히 한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한센병이라는 것 자체가 옛날엔 저주라고 여겨지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다미엔 선교사는 하나님께 자기도 한센병에 걸리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예? 진짜요?”
“그리고 정말 한센병에 걸렸습니다. 한센병에 걸려서 자신의 인생을 저주한 것이 아니라 한센병 환자들을 찾아가서 다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그 섬의 한센병 환자 800명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병이 나아서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자기들을 위해 똑같은 형편이 된 사람을 보고 마음을 열고 그 말에 귀를 기울인 때문이죠.”
“정말 대단하네요.”
“저희 집안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저희 이모부는 의사이고, 저희 이모님은 전도를 열심히 하고 비신자들과 성경공부도 하는 분이었습니다. 사촌동생은 겨울에 거지에게 겉옷을 벗어줄 정도로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대학시절 여름에 봉사활동 갔다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아이고…”
“어떤 사람들은 전도를 열심히 하는데 왜 그런 일을 당하냐고 비난하기도 하고, 딱하다고 위로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저희 이모님의 말씀에 의하면 어느 누구의 이야기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저희 어머니의 위로나 권면도 거부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모님이 사시던 동네에 약 1년 전 사고로 아들을 잃고 실의에 빠져 두문불출하던 분이 있었는데 먼저 연락을 해왔다고 합니다. 두 분은 다른 말도 없이 두 손을 붙잡고 한참을 울었다고 합니다. 아들을 잃은 엄마들만 통하는 정서가 있었던 것이지요. 나중에 그분은 저희 이모님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
“예수님도 가난한 동네에서 사시고, 동생들 건사하며 가장 역할 하시고, 사회의 멸시와 오해 속에서 복음을 전파하시고, 배신과 암투 속에서 목숨을 잃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예수님께 자기의 딱한 사정을 말하기도 하고, 예수님의 위로를 받는 겁니다.”
“그런 면도 있네요.”
“누군가의 고통이 고통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고통을 당하고 실의에 빠진 사람에게 손을 내밀고 위로하고, 또 위로함으로 위로 받고 함께 재기하는, 이론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을 경험하는 거죠. 이건 기독교인에게만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기독교인도 그런 일을 당하고 함께 살아가는 사회인 중 한 명이라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