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시즌2] (28) 36:1-43

“하나님은 하나님 믿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만 관심을 가질까요?”
“그런 것 아닌가요?”
“아닙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에도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그건 오해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이시고, 또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십니다.”
“그럴 줄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만 잘해주는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이고 사람은 시간과 공간 속에 있기 때문에 시각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이 사람이 하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로 판단합니다. 하지만 미래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알 수 없지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과거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지만 현재에는 하나님을 믿게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도 예전에는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았지만 현재에는 저와 성경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와 현재의 알고 있는 내용을 근거로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계획하고 그것을 이루시는 분이고, 그래서 미래를 알고 계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과 모든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계신다니까 기분이 좀 묘하네요.”
“어떤 면에서요?”
“하나님이 우리 식구들에게도 관심을 갖고 계신다는 거잖아요?”
“맞습니다. 저는 아무 능력이 없는 사람인데도 거의 매일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족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도 이런데 하물며 하나님이시겠습니까? 저는 사실 여러분 가족의 얼굴을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여러분 가족의 얼굴도 아시고 사정도 아시는 분입니다.”

“야곱의 형 에서를 기억하세요?”
“예.”
“에서는 원래 이삭의 장남이었지만 하나님의 택함을 받지 못했고 대신 택함 받은 야곱이 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에서와 그 후손은 가난하고 병들고 힘들게만 살았을까요?”
“성경에서는 하나님 복을 받지 못하면 그런 것 아닌가요?”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창세기를 보고 있는데요,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삭과 그 아들 야곱에게 복이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복은 그 사람만 잘 먹고 잘 사는 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처음 부르실 때부터 하나님은 그 복의 성격을 나타내셨습니다. 그건 ‘네가 복의 통로가 되고 다른 사람들이 너를 통해서 복을 받을 것이다.’라는 겁니다. 그 핵심이 뭐냐면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구원자 예수님이 태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자타의 오해 때문에 기독교가 배타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예수님 이후로 배타적인 모습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에서의 후손 중에도 예수님을 믿고 천국의 복을 받는 사람이 나오기도 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기독교는 민족은 물론이고 신분 사회에서도 서로 차별 없이 대하는 것이 처음 교회부터 특징이 되었습니다.”
“그렇군요.”
“창세기 36장에는 에서의 족보가 나옵니다. 에서에게는 어떤 후손들이 있고, 어떤 민족들이 나왔는지 적혀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에서에게서는 열한 족속이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사해 동부와 아라비아 반도 북부에 걸쳐 살았다고 나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 왕이 세워지기 전에 그들은 이미 왕국을 세우고 왕이 있었다고 나옵니다. 에서는 메시야를 낳을 혈통은 아니지만 나름 잘 먹고 잘 사는 복을 주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배타적이거나 편협한 게 아니네요.”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초기 기독교 때는 박해가 너무 심하니까 신자와 비신자 사이에 거리를 두는 모습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는데 교회나 신자들도 박해 당하는 시대처럼 너무 몸을 사리듯이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맞아요. 그런데 너무 신자와 비신자를 차별하는 인상을 받아요.”
“심하게 박해를 받고 오해를 받았던 역사가 있어 그러니 일정 부분은 이해를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목사님이 그렇게 설명해 주시니까 기독교인들이 왜 폐쇄적인지 좀 이해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