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우리나라에도 남편이 일찍 죽으면 그 부인을 향해 ‘남편을 잡아먹은 여자’라는 둥 너무 가혹한 평가가 따른 것 알고 계시죠?”
“예.”
“시간이 흘러 유다의 셋째 아들이 장성했습니다. 그런데도 시아버지 유다가 며느리 다말을 불러들이지 않고 셋째 아들을 남편으로 주지 않는 겁니다. 셋째 아들도 잘못 들어온 며느리 때문에 죽을까봐 결혼을 시킬 수 없는 거죠. 그 염려도 이해가 되지만 며느리 다말로서는 너무 억울했을 겁니다. 만약 며느리 입장이시라면 어떡하시겠습니까?”
“글쎄요. 가만히 있을 수는 없고 뭔가 대책을 세우긴 하겠지요.”
“수천 년 전 이 지역에서 며느리 입장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극단의 계책을 세웁니다. 마침 시아버지 유다가 기르던 양털을 깎기 위해 딤나라는 지역에 갔습니다. 다말은 과부의 옷을 벗고 창녀의 옷을 입었습니다. 고대 가나안 신전에는 창녀들이 있었습니다. 그 창녀들과 관계하는 것이 신을 섬기는 일 중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합법적으로 매춘을 할 수 있었던 겁니다. 다말이 그런 창녀의 복장을 하고 시아버지 유다의 눈에 띌 만한 곳에 앉아있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시아버지가 며느리인 줄 모르고 매춘을 하겠다고 제안을 했습니다.”
“어떻게 며느리를 몰라볼 수가 있죠?”
“지금도 아랍 지역 여인들이 복장으로 얼굴과 몸을 가리면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창녀 복장을 하기도 했고, 자기 며느리가 거기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겠죠.”
“양털 깎으러 갔으면 양털을 깎아야지 그런 짓을 할 생각을 하다니. 남자들이란.”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지역의 풍습이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야곱의 아들인 유다도 그들의 풍습을 아무 생각없이 따른 겁니다. 지금도 다른 사람들이 한다고 해서 유행을 따르거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산다고 해서 그 방식이 옳거나 괜찮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이 성경 말씀을 듣고 직접 읽으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 지 깨닫는 겁니다.”
“근데 성경대로 사는 기독교인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은데요.”
“그 부분에 대해선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유다처럼 비판의식없이 세상의 풍습을 그냥 따라서 그렇습니다. 잘못하는 거죠. 교회에서 하나님 믿으면 복 받는다는 이야기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믿었으니 좀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더 해야 합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목사로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목사님이 사과할 일은 아닌데요.”
“아무튼요. 시아버지 유다는 염소 새끼를 매춘의 대가로 주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염소 새끼를 지금 몰고 온 게 아니니까 며느리 다말은 그 담보로 유다의 목에 끈으로 걸고 있던 도장과 잡고 있던 지팡이를 요구합니다. 유다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창녀와 관계를 가지는데 실은 며느리였던 겁니다.”
몹시 불쾌한 인상을 지으며 “성경에 정말 별 희한한 이야기까지 다 적혀 있네요.”라고 말했다.
“성경은 고상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만 적어서 인간의 마음을 순화시키려는 책이 아닙니다. 인간의 실상을 드러내고 인간도 스스로 혐오할 만한 그 인간을 사랑하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그건 알지만 그래도 굳이 이런 이야기까지 적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네요.”
“성경은 인간의 염증을 달래주는 책이 아니라 도려내는 책이라서 읽는 사람을 아프고 당혹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의사가 중병이 걸린 사람에게 마음 상할까봐 소화제만 주면 되겠습니까? 환자가 놀라더라도 실상을 제대로 알려주고 잘 치료받도록 해야죠. 성경은 그런 역할을 하는 책인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