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며느리가 그다음에 어떻게 됐습니까?”
“며느리 다말의 목적은 시아버지 유다와의 동침이었기 때문에 창녀의 의복을 벗고 원래 자기가 입었던 과부의 의복으로 다시 갈아입었습니다. 시아버지 유다가 다른 사람을 통해 약속대로 염소 새끼를 보내어 창녀를 찾도록 했는데 사람들은 여기에는 창녀가 없다고 답했습니다. 당시에는 매춘업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있던 신전에는 잡일을 하는 여인들이 있었는데 이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 그들의 신을 섬기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가나안 사람들은 그 신들이 성적 교합을 통해 사람들에게 풍요를 준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 신을 믿는 사람들도 신을 섬긴답시고 죄책감없이 음란한 짓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 종교가 있어요?”
“당시 가나안 사람들이 그랬다고 합니다. 가나안 사람들 뿐만 아니라 당시 그리스나 다른 지역에서도 여자 사제는 거의 창녀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네요. 그때는 남자들이 열심히 신전에 갔겠네요.”
“그것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르지요. 아무튼 유다는 자신의 인장과 막대기를 찾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습니다.”
“뭔가 찝찝했겠는데요?”
“창녀와 동침한 일에 대해서 그렇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런 의식이 희박했으니까요. 찝찝했다면 자신의 인장과 지팡이를 찾지 못해서일 것입니다. 그런데 불편한 소식이 들렸습니다. 며느리 다말이 임신을 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그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당신의 며느리 다말이 간음을 저질러서 임신하게 되었다.’고 전달합니다.”
“다른 사람과 간음을 저지른 게 아니잖아요?”
“그러게 말입니다. 중간에서 말을 전하는 사람이 임신 사실만 전한 게 아니라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라는 식으로 간음을 저질렀다고 이야기를 집어넣은 겁니다. 말을 전할 때는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정말 확인된 사실만 전해야 하는데 사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드물죠. 다들 양념을 치고 이스트를 넣어서 이야기를 부풀립니다.”
“맞아요. 그래서 인간관계에 문제가 많이 생기는 것 같아요.”
“이런 것도 사람의 악함을 알 수 있는 대목인 거죠.”
“맞습니다. 사람은 죄인입니다.”
“또 무슨 일이 있으셨나 보네요?”
“새로 들어온 알바생이 몇 번이나 가르쳐 줬는데도 같은 실수를 계속 반복해서 아까운 음료를 버리게 만들었거든요. 그런데 미안한 기색도 없어요. 그래서 이제는 알바비에서 제하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조심하고 신경을 좀 쓰는 것 같아요.”
“알바가 아니라 상전이네요. 속상하셨겠습니다.”
“돈 몇 푼보다 조카뻘 되는 학생이 인생을 그렇게 사는 게 안타까와서요.”
“유다는 며느리의 임신 소식을 듣고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며느리를 불살라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자기가 임신을 시킨 거잖아요?”
“그랬죠. 이 사건은 유다가 얼마나 위선적이며 이중적 잣대를 갖고 사는 사람인지 보여줍니다. 전형적인 내로남불이죠. 자기는 뭐가 급하다고 자신의 인장을 담보로 하면서까지 매춘을 하면서 며느리의 임신 소식에 대해서는 인정사정없이 죽이라고 했으니까요.”
“며느리가 시아버지의 인장을 가지고 있잖아요?”
“맞습니다. 다말이 끌려나갈 때 자기를 임신시킨 사람의 물건이라면서 끈 달린 인장과 지팡이를 내놨습니다.”
“시아버지가 자기 것인 줄 금방 알아봤겠죠?”
“당연히 알아봤죠. 그리고는 자기가 법대로 장성한 막내 아들을 남편으로 주지 않아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실토하고 뉘우쳤습니다.”
“그래서 며느리는 살았습니까?”
“예, 당시 유다는 아내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더이상 후사에 대한 이야기가 없거든요. 그렇다고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고 며느리를 아내로 삼은 건 아니었습니다. 대신 임신한 아이를 그대로 출산할 수 있게 했습니다. 며느리 다말은 쌍둥이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쌍둥이를 출산할 때 아주 드문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했는데요, 첫째의 머리가 나온 게 아니라 손이 먼저 나온 겁니다. 그 당시는 나오는 순서가 아주 중요했으니까 구별을 하기 위해 산파가 첫째 손에 붉은 실을 맸다고 합니다. 그런데 몸이 나오지 않고 나왔던 손이 다시 엄마 뱃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대신 손에 붉은 실이 없는 둘째가 먼저 양수를 터뜨리며 바깥으로 나온 겁니다. 그래서 산파가 그 둘째를 가리켜 ‘터뜨렸다’라는 의미를 가진 ‘베레스’라고 불렀고 그것이 그 아이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부모가 그렇게 부른 게 아니고 산파가 불렀는데도 이름으로 정해지는 건가요?”
“그러게요. 우리로서는 참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인데, 성경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는 이 쌍둥이가 유다의 대를 잇게 됐습니다. 유다는 먼저 있었던 아들들을 통해서 대를 잇고자 했으나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고 막내이자 셋째 아들을 살리고자 며느리를 떠나보내기까지 했지만 자기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방법으로 대를 잇게 됐습니다.”
“우리 인생과 비슷하다는 말씀을 하시려는 거죠?”
“아니, 어떻게 아셨어요?”
“목사님과 공부하다 보니 이제는 대충 알 것 같아요.”
“지금은 안되는 것 같고 수치스러운 일이 나중에는 좋은 열매가 될 수도 있고, 내가 잘 계획하고 심혈을 기울였는데도 오히려 내 인생에 뼈아픈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이런데 어떻게 자기 자신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젊을 때는 그런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았는데, 나이를 먹을 수록 내 맘대로 되는 게 없다는 걸 많이 느끼다 보니 좀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인생을 보는 눈이 생기는 거죠. 여기에서 시아버지 유다가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모습을 보이는데요, 이 사람을 잘 기억해 두십시오. 저 뒤쪽에 가면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한 번 더 나오거든요.”
“기억 못할걸요. 그때 목사님이 한번 더 이야기해 주시면 혹시 기억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당연히 제가 언급해 드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