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아름다운 삶의 제자도, 초대'(이진오 목사 저)라는 책으로 창세기 공부를 마친 분들과 기독교 신앙의 기본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해서 공부하는데,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내용이 나왔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라고 했을 때는 아무런 거부감 없이 그냥 받아들이던 분이 갑자기 여기에서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을 그냥 ‘하나님’이라고만 부르면 안되나요?”
“불편하신 부분이 있으세요?”
“아버지가 여러 명일 수 있나요? 아버지는 한 분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을 왜 ‘아버지’라고 불러야 하죠? 전 그게 이해되지 않아요.”
“그래서 불편하셨군요. 맞습니다. 내게 아버지가 있는데 아무리 좋은 존재라고 하더라도 굳이 ‘아버지’라고 불러야 한다는 건 정서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죠. 게다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성씨도 각각인데 전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니 정말 적응되지 않습니다. 유교적 전통이 강한 우리 나라 정서로는 충분히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기독교 신앙의 아주 독특한 부분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단순히 신의 존재를 믿고 그 신을 섬기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하듯 하나님은 믿는 자를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삼아주십니다. 누가 상속자가 될 수 있을까요?”
“아들이겠죠.”
“맞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상속자는 누구일까요? 하나님의 아들이 누구죠?”
“예수님이요.”
“맞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는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의 영이 믿는 사람 속에 들어온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뭐라고 부르는지 아세요?”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겠죠.”
“맞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죠.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 우리에게 온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마음을 품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부르면 뭐라고 불러야 되겠습니까?”
“‘아버지’라고 불러야 되겠네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익숙하지도 않은 대상을 ‘아저씨’도 아니고 갑자기 ‘아버지’라고 부르려니 어색할 수밖에 없죠. 하지만 어느 순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될 때 마치 이산가족이 상봉한 것 같은 감격이 넘치게 됩니다. ‘아, 이분이 내 아버지가 맞구나.’라고 고백하는 일이 벌어지는 거죠. 그후로는 전혀 거리낌이 없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 지금은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는 것이 어색하시면 그냥 ‘하나님’이라고만 부르세요.”
“안그래도 그러고 있어요. 잠깐만요 화장실에 좀 다녀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