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왜 ‘아버지’라고 불러야 하죠?”(2)

화장실에 다녀온 비신자가 자리에 앉더니 갑자기 내게 물었다.
“목사님, 방금 한 곡조가 떠올랐는데 혹시 이 노래 아세요? 딴-따다 따다다다 딴따-다다다-“
“알죠. ‘그 어린 주 예수 눌 자리 없어’라는 캐롤인데요. 찬송가에 있어요.”
“화장실 다녀오는데 갑자기 왜 이 곡이 떠올랐을까요?”
“글쎄요. 제가 안그래서 모르겠는데요.”
“갑자기 떠오른 것도 이상하고, 그것이 캐롤인 것도 너무 뜬금없지 않아요?”
“이상하네요. 크리스마스 시즌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래도 곡조가 떠올랐으니 함 불러봅시다.”
비신자를 내게 소개해 준 분이 찬송가를 함께 부르자고 제안했다.
패드로 검색해서 찾으니 찬송가 108장이라고 나왔다.
“108배 생각하면 되겠네요.”
“그러네요. ㅎㅎㅎ”
내가 기타를 잡고 코드를 G로 낮춰 불렀다.
3명이 1절부터 3절까지 모두 불렀다.
3절까지 마쳤을 때 비신자가 말했다.

“목사님, 왜 이 곡이 떠올랐는지 알 것 같아요.”
“그래요? 어떻게요?”
“3절을 부르는데 갑자기 소름이 끼쳤어요. 마지막에 ‘주 품 안에 안겨 살게 하소서’를 부를 때요. 주님 품 안에서 살라고 하시는 모양이네요. 지금 그걸 떠올리고 말하는데도 다시 소름이 쫙 끼치네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 불편하다고 하니까 하나님이 ‘아버지’가 맞다고 신호를 보내신 모양입니다.”
“그런가봐요. 우~~ 또 소름!”

“성경 요한계시록 3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선친의 큰 성경을 꺼내들고 요한계시록 3장을 펼쳤다.
“한번 읽어 보시겠어요?”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요한계시록 3:20)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 문을 확 밀고 들어오지 않으십니다. 바깥에서 노크를 하고 열어줄 때까지 기다리세요. 혹시 예수님이 문 두드리는 성화를 보신 적 없으세요?”
“없는데요.”
난 패드에서 ‘문 두드리는 예수님’을 검색해서 기독교인에게는 너무도 유명한 그림을 보여줬다.

문 두드리는 예수님 성화 [포털 캡처 강신욱]

“예수님은 이렇게 마음 문을 두드리세요. 오늘 예수님이 OO씨의 마음 문을 두드리시는 모양입니다.”
OO씨는 상기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모임을 마치고 나는 유튜브에서 ‘똑똑똑 문 좀 열어 주세요’라는 어린이 성가를 검색해서 단톡방에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