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시즌2] (37) 39:6-23

“주인이 요셉에게 재산을 맡기니까 기본적으로 재산이 잘 관리될 뿐만아니라 오히려 증식이 되었다네요. 내가 주인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요셉에게 주식, 부동산, 현금 다 맡겨야죠.”
“정말 보디발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잘 돌아가니까 보디발은 요셉에게 잘해줬겠죠. 요셉은 노예로 팔려왔는데 실은 노예답지 않은 삶을 살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런 작은 행복이 계속 유지되지 못했습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편안하게 사는 걸 못보시는 것 같아요.”
“그게 아니라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하나님의 사인같은 거죠.”
“그래서 이번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보디발의 아내, 그러니까 안주인이 요셉에게 추파를 던진 것입니다.”
“주인인데 노예에게 그랬다고요?”
“요셉이 좀 잘 생겼던 모양입니다. 게다가 똑똑하게 집안재산을 관리한다고 하니 더 잘생겨보였겠죠. 고대 신분사회에선 남성은 여성 노예를, 여성은 남성 노예를 성적 노리개처럼 삼았다고 합니다. 어차피 물건처럼 여겼으니까요. 게다가 보통 파라오의 경호실장 정도면 나이가 제법 있을텐데 부인은 나이가 어렸을 확률이 높거든요. 젊고 똑똑한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겼을 수도 있지요.”
“요셉이 안주인의 요구에 순종했나요?”
“그게 문제입니다. 요셉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야 일신이 편할까요?”
“원래 사회적으로 허용된 것이라면 안주인의 요구에 따르는 게 편하겠죠.”
“게다가 요셉은 지금 객지에서 노예로 사느라 외롭고 힘들테니까 남자라면 그런 요구에 쉽게 넘어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안주인의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보디발이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맡겼지만 안주인만은 맡기지 않았다, 그러니 자신은 주인에게 악으로 갚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거기에 한 마디를 덧붙였습니다. 하나님께 죄를 지을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이 고백이 왜 중요하냐면 하나님은 요셉이 노예로 팔려오게 내버려뒀거든요. 그런데 요셉이 그것마저도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자기가 맡은 일에 복을 내려주셔서 인정 받고 좋은 대우를 받게 된 것을 감사히 여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섬기고 의지하며 살았다는 거죠. 전 사실 요셉이 이때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는지가 참 궁금하거든요.”
“그러네요. 노예가 신앙생활을 할 수 있나요?”
“아마 거의 불가능하고 혼자 있을 때 마음 속으로나 가능했을 겁니다. 아쉽게도 성경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사실 현대인에게는 그런 내용이 더 필요할 것 같은데 말이죠. 그런데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궁금해하지만 그게 핵심이 아니라는 겁니다. 핵심은 하나님을 섬기고 의지하는 사람이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의 여부라는 거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이기적인 태도 때문에 하나님을 못믿겠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그게 사실입니다.”

“다시 요셉 이야기로 돌아가죠. 노예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안주인은 기분이 어떨까요?”
“안좋을 것 같아요.”
“요셉을 꼬실 생각이 없어질 것 같아요.”
“그렇죠?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포기할 것 같은데, 안주인이 포기하지 않고 날마다 동침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어쩌면 자기가 안주인이니까 요셉을 굴복시키고 싶은 욕심이 생겼는지도 모르죠.”
“그러다가 묘한 날이 왔습니다. 요셉은 여느 때처럼 일을 하러 갔는데 집에 다른 노예들이 없는 겁니다.”
“안주인이 다 내보낸 모양이네요.”
“어떻게 아세요?”
“척하면 척이지요.”
“안주인은 요셉이 다른 사람의 이목이 두려워서 그렇게 못하는 줄 알고 걸림돌이 될만한 걸 다 치웠습니다. 요셉을 위해 배려한 거죠. 쉽게 죄를 짓도록 말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상황이 생길 수 있습니다. 내가 못된 짓을 해도 들키지 않을 상황 말입니다. 이런 경험 있지 않으세요?”
“어릴 때 있었던 것 같아요.”
“어떤 일이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세요?”
“뭘 사먹고 싶어서 엄마 돈에 손을 댔죠.”
“들켰나요?”
“아뇨, 그래서 몇 번 더 했어요.”
“어머님이 정말 몰랐을까요? 저는 우리 아이들이 제 돈에 손을 대면 금방 알겠던데요.”
“아… 그러네요.”
“어머님이 모르는 척하고 눈감아주신 걸 겁니다. 그걸 모를 리가 없죠. 만약 지금 자녀가 지갑에 손을 대면 모르시겠어요?”
“혹시 한두 번은 몰라도 알 것 같아요.”
“모르는 척해주신 어머님께 감사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죄 짓는 걸 모르실까요? 아주 작은 죄, 죄라고 하기도 그런 죄 말입니다.”
“다 아실 것 같아요.”
“사실 죄는 작은 죄라고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작은 죄든 큰 죄든 다 처벌 받아야 맞죠. 하나님도 다 아시지만 바로 처벌하지 않고 우리가 ‘잘못했습니다’라고 고백하길 기다리시는 겁니다.”

“안주인은 아무도 없는 기회를 틈타 요셉의 옷을 붙잡고 동침을 요구했습니다. 당시 노예는 별로 옷을 입지 않았는데 요셉으로서는 진짜 난감한 상황이 된 겁니다. 보통 이런 경우엔 일이 어떻게 돌아갈까요?”
“아무도 없는 데다가 안주인이 그렇게 매달리면 못이기는 체하고 들어주겠죠.”
“그런데 요셉은 의외의 선택을 합니다. 안주인에게 잡힌 옷을 벗어두고 그 자리를 나가버린 겁니다.”
“요셉이 진짜 대단하네요.”
“그때 안주인이 돌변합니다. 아마 자존심이 너무 상한 모양입니다. 소리를 지르고 사람들을 불러 요셉이 자기를 겁탈하러 왔다고 말한 겁니다.”
“요셉에게 완전히 뒤집어 씌웠네요.”
“그러면서 요셉이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버려두고 간 옷을 그 증거로 제시합니다. 나중에 귀가한 자기 남편에게도 똑같이 말합니다. 요셉은 죄를 짓지 않으려고 했는데 오히려 죄를 뒤집어쓰는 증거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인생은 이렇습니다. 나는 바르게 살려고, 잘 살려고, 배려하려고 손해를 봤는데 오히려 일이 엉망이 된 경우 있지 않으세요?”
“많죠. 속상한 일 많았습니다. 덕분에 인생을 배웠죠.”
“어떤 걸 배우게 되셨어요?”
“너무 잘하려고 애쓸 필요 없다.”
“예? 의외의 교훈이네요. 그런데 맞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너무 마음을 쓰면 기대를 하게 되는데 세상 일이라는 게 우리의 기대대로 돌아가지 않으니까요. 그러면 다음부터 마음을 쓰기가 두렵죠. 그래서 적당히 하는 것도 인생의 지혜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요셉의 경우는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왜 하나님은 요셉을 이렇게 몰아부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이러니까 사람들이 믿기가 어려운 거죠. 하나님이 잘 해주시면 당연히 사람들도 많이 믿을 것 아닙니까?”
“하나님도 그걸 아실텐데, 왜 그러실까요? 그 다음 이야기가 또 있습니다.”

“요셉의 주인이 화가나서 요셉을 가두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주인 보디발의 직업이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세요?”
“경호실장이라면서요.”
“예, 그래서 요셉을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에 가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왕의 눈에 벗어난 사람들을 가두는 정치범 수용소 같은 곳이죠. 요셉의 기분이 어떨까요?”
“죽고 싶었을 것 같아요.”
“맞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집에서 10년 넘게 있었거든요. 긴 세월 동안 충성을 다해서 집안 살림을 맡는 자리까지 왔는데 자기는 양심을 지켰더니 완전 뒤집어써서 노예보다 더 못한 감옥에 왔으니까요. 요셉은 너무 힘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감옥에 있는 요셉에 대해 의외의 말을 합니다. 그 부분을 한번 읽어보시겠어요?”

창세기 39:21-23 
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22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23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요셉이 감옥에 갔는데 하나님이 함께 하셨답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감옥에 있다가도 나와야 될 것 같은데 그게 아닙니다. 우리는 환경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느냐, 도와주시느냐를 판단하는데 성경의 시각은 다릅니다. 비록 요셉이 감옥에 있어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셉이 경호실장의 눈에 들어서 모든 집안일을 요셉에게 맡긴 것처럼 이번에는 간수장의 눈에 들어서 감옥의 사무를 요셉에게 맡긴 것입니다.”
“일복이 터졌네요.”
“요셉이 처음 경호실장의 집에 왔을 때 요셉의 형편에 대해서 무슨 단어를 썼는지 기억하세요? 좀 독특한 단어를 썼는데…”
“형통요.”
“맞습니다. 그런데 감옥에서도 ‘형통’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게 성경의 독특한 시각입니다. 우리는 노예나 감옥은 형통할 수 없는 형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걸 벗어나야 형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형통’이고,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그게 ‘형통’이라는 겁니다.”
“이런 형통은 좀 별로인데요.”
“사람들은 일이 잘되는 걸 ‘형통’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도와주시는 걸 ‘형통’이라고 한다는 거죠. 중요한 건 형편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거죠. 똑같은 단어인데 개념이 다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에선 이런 단어의 의미를 성경적으로 재규정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