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왕인 파라오가 꾼 꿈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살진 암소 일곱 마리가 나일강 가에서 풀을 뜯어 먹고 있었습니다. 이어서 바싹 마른 일곱 암소가 함께 보이더니 그 살진 암소 일곱 마리를 모두 잡아먹었습니다. 만약 이런 꿈을 꾸면 기분이 어떠시겠어요?”
“기분이 안좋을 것 같아요.”
“놀라서 깰 것 같아요.”
“맞습니다. 파라오가 잠을 깼어요. 만약 한밤중에 이런 흉몽을 꾸고 놀라서 잠을 깨면 어떻게 하세요? ‘이건 꿈이야.’하고 바로 잠을 청하는 스타일이세요, 아니면 무슨 꿈일까 생각해보거나 꿈이 이어질까 무서워서 조금 시간을 보낸 후에 잠을 청하는 스타일이세요?”
“피곤하니까 빨리 다시 자야죠.”
“꿈에 별로 의미를 두시지 않는 스타일이시군요. 파라오도 다시 잠을 청했는데 이번엔 다른 꿈을 꾸게 됐습니다. 곡식 한 줄기가 있는데 잘 익은 일곱 알곡을 맺었습니다. 이어서 마른 이삭 일곱 개가 나오더니 잘 익은 알곡을 삼켜버렸습니다. 이번에도 파라오가 잠을 깼는데 연달아 비슷한 꿈을 꾸었기 때문에 아침에 파라오의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만약 비슷한 꿈을 두 번 연달아 꾼다면 그 의미가 궁금하지 않겠어요?”
“그렇죠. 좋은 꿈이면 복이 날아갈까봐 입을 다물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지만 흉몽은 재수없는 일을 어떻게 막을 방법이 없을지 묻고 알아보겠죠.”
“파라오도 이집트에 있는 유명한 점술가들과 현자들은 불러 꿈 이야기를 해주고 해몽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해석하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좀 이상하네요. 점술가나 현자들인데 왜 해석을 못하죠?”
“그렇죠? 우리 같은 사람도 다른 사람 꿈 이야기를 들으면 ‘이런 꿈일거야, 저런 꿈일거야.’ 말을 하는데 말입니다. 평소 같은면 ‘그 꿈은 대충 이런 의미입니다.’라고 얘기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파라오가 워낙 심각하니까 잘못 말했다가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겠다고 느꼈는지도 모르죠. 아무도 말을 못하니까 분위기가 더 어색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술 담당 비서관이 반짝 기억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무엇일까요?”
“요셉을 기억했군요.”
“맞습니다. 술 담당 비서관이 파라오에게 자기와 빵 담당 비서관에게 있었던 일을 말했습니다. 자기 꿈을 용하게 알아맞춘 사람이 경호실장의 감옥에 있다고 했습니다. 파라오가 사람을 보내 요셉을 꺼내오게 했습니다. 감옥에 있던 사람이 왕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씻고 좋은 옷을 입고 가야죠.”
“맞습니다. 2년 간 깎지 못했던 수염도 깎고 옷도 갈아입고 파라오를 만났습니다. 파라오가 요셉에게 ‘네가 해몽을 잘한다면서?’라고 물었습니다. 요셉은 ‘제가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겁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노예요, 죄인 신분인 요셉이 감히 파라오 앞에서 자기가 믿는 신이 따로 있음을 밝힌 겁니다. 평소 같으면 ‘저놈의 목을 쳐라.’라고 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파라오는 자기가 급하기 때문에 자기가 꾼 꿈을 요셉에게 말했습니다. 마지막에 ‘아무도 내 꿈을 해몽하지 못한다.’고까지 말했습니다. 꿈 이야기를 들은 요셉의 첫 마디가 남달랐습니다. ‘두 꿈은 하나입니다. 이건 하나님이 하실 일을 파라오에게 알리신 겁니다.’ 만약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어떨 것 같습니까?”
“신뢰감이 생길 것 같습니다.”
“요셉이 해몽을 했습니다. 그 꿈은 앞으로 칠 년 동안 풍년이 있고, 뒤이어 칠 년간 흉년이 있을 것인데 그 흉년이 심해 앞의 풍년이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흉년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풍년 동안 수확의 20%를 이집트 곳곳에 저장해서 흉년을 대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 지혜로운 사람을 세워서 진행하라고 했습니다. 해몽 뿐만 아니라 대비책까지 제시한거죠.”
“대단하네요. 진짜 영화같습니다.”
“파라오는 ‘해몽한 네가 가장 지혜롭다. 너를 이집트의 총리로 삼겠다.’고 했습니다. 왕의 인장 반지를 주고, 고관의 옷을 입히고, 좋은 집안의 딸과 결혼을 시켰습니다. 노예에서 갑자기 모든 사람의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만약 2년 전에 요셉의 억울함이 풀리고 감옥에서 나왔다면 어땠을까요?”
“총리가 되지 못했겠죠.”
“만약 감옥에 있는데 당장 억울함이 풀리고 나갈 수 있다는 것과 2년 뒤 총리가 될 수 있는데 억울함과 배신감을 견뎌야 한다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면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2년을 버텨야죠.”
“결말을 알면 그걸 선택할 수 있지만 결말을 모르니까 사람들은 눈앞의 이익을 선택하게 됩니다. 베스트셀러였던 ‘마시멜로 이야기’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죠. 그 책에서는 15분 뒤라는 분명한 시간과 보상을 약속했는데도 사람은 당장의 이익을 선택하는 성향을 갖고 있다는 걸 지적합니다. 그만큼 인간이 약하다는 거죠. 어쩌면 그런 사람에게 ‘믿음’이나 ‘기다림’이란 건 너무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 면에서 ‘믿음’과 ‘기다림’은 전 인격적인 일이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결말을 모르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요셉 한 사람을 위해 이런 일을 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 이야기는 좀 뒤에 하고요. 요셉으로서는 가나안 땅에서 아버지로부터 편애를 받더라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요셉이 억울함과 배신감 속에 있을 때는 하루가 한 달 같았을 겁니다. 마치 입대한 훈련병처럼 말이죠. 군대에서는 정말 시간이 가지 않거든요. 그런데 그날들을 참고 버텼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을 겁니다. 실은 하나님이 요셉에게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도록 하신 거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하나님을 믿고, 말씀대로 살고, 기다리는 것이 힘들고 게다가 억울하기까지 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기독교인들 중에도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들도 보이니까 기독교 신앙이 대수롭지 않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진정한 기독교인은 요셉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억울함을 참고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억울한 것을 대신 갚아주시고, 보상해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 자녀들의 미래를 걱정하지만 사실 내 미래도 확신할 수 없는 분들이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여러분이나 여러분 자녀들의 미래를 하나님께 의지하라는 겁니다. 그분은 ‘나를 믿고 의지하라’고 곁은 내준 유일한 분이니까요. 그렇게 하는 방법이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받아들이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