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받아줄 수 있었을까?

예수님은
정치적 간음자 세리,
육체적 간음자 창녀,
신앙적 간음자 바리새인이라도
회개하면 불쌍히 여기시고 받아주셨다.

전에는 예수님이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아무리 예수님이라도 전후관계가 있는데,
어떻게 불쌍히 여기시고 받아주실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바울의 권면을 받은 빌레몬은
주인의 물건을 훔쳐 도망간 노예 오네시모를
어떻게 받아주었는지
게다가 같은 신앙을 가진 형제처럼 여길 수 있었을까 궁금해졌다.

이런 게 궁금해지면 안되는데,
누군가 내 뒤통수를 세게 칠 일이 있으려나 보다.
내가 바로 그놈을 받아줘야 할 일이 있으려나 보다.

나를 받아주신 용납과 사랑을 알기에
‘나같은 것도 받아주셨으니 나도 받아줘야지’라고 적용하려니
벌써 가슴이 답답해 온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해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해 주시옵고”
엄청난 무게의 이 구절을
“주기도문으로 모임을 마치겠습니다”라는 구령에 맞춰
그 많은 세월동안 별 무게를 느끼지 못하고 왼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무지했다고 해야 할까?

속이 울렁거리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