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장 1절에 에덴동산을 나온 아담이 하와와 동침했다고 했습니다. 이 ‘동침하다’라는 단어는 원래 ‘알다’라는 의미입니다. 직접 보고 확인하고 인식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떤 영어성경은 ‘know’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부부는 배우자를 그렇게 알아야죠. 성인이 되어서는 가족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배우자의 벗은 몸을 보는 것 뿐 아니라 남들이 모르는 배우자의 마음도 그렇게 보고 알아야 합니다”
모인 사람들이 모두 가정이 있는 누군가의 아내인지라 이 부분을 사뭇 진지하게 듣는 것 같았다.
그렇게 설명하는 나를 빤히 쳐다보는데 사실을 실토하지 않을 수 없다.
“저는 목사니까 그렇게 잘 살고 있다는 건 아닙니다. 저도 이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저희는 아무 말 안했는데요”
“그냥 그렇다구요”
“하와가 임신해서 가인을 낳았다고 했습니다. 이건 성경에 아담과 하와가 자녀를 낳은 첫 기록이긴 하지만 가인이 아담과 하와가 낳은 첫 자녀인지는 모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는 분명하게 적혀 있지만 예를 들어 족보가 모든 사람을 빠짐없이 기록하는 것은 아닙니다. 고대 수메르 왕국의 기록에 보면 일곱 왕들이 언급되는데 그 왕들의 재위기간이 수만 년에 이릅니다. 그건 그 왕들의 수명이 1만 년에 이르렀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큰 업적을 세운 왕들을 중심으로 기록하며 대신 많은 왕들을 생략한 것이죠. 고대 사람들은 족보를 그런 식으로 기록했다는 겁니다. 성경이 가인을 처음 언급한 것은 가인이 바로 뒤에 큰 사건을 저지르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농사짓는 사람이었고, 아벨은 양 치는 자였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각각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가인은 곡식으로, 아벨은 양으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4절과 5절을 보세요.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이걸 어떤 만화 성경은 아벨의 제물을 태운 연기를 가지런히 하늘로 올라가고 가인의 제물을 태운 연기는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가인에게 되돌아가서 연기를 뒤집어쓴 가인이 재채기를 하는 걸로 표현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가인이 자신의 제물을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다는 걸 분명히 알 수 있는 어떤 일이 있었다는 거죠”
“그런데 여기서 하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보통 성경에서 제물을 드린다고 하면 제물이 무엇이어야 할까요?”
“양이요”
“예, 그래서 가인이 양을 제물로 하지 않고 곡식을 제물로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건 오해입니다. 왜냐면 나중에 하나님이 제사법을 율법으로 주시는데 거기에 보면 곡식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도 나옵니다. 가인이 곡식을 제물로 바쳤기 때문에 하나님이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는 건 정확한 이유가 아니라는 거죠. 4절에 하나님이 아벨이 드린 양만 받으셨다고 되어 있나요?”
“아니요. 아벨과 그의 제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받지 않은 가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받으실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던 모양인데 성경은 그 일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그 사람을 받지 않으시면 그의 제물도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가인은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안색이 변했습니다. 핑계대고 변명했던 아담과 하와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건 결국 하나님 탓을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7절에서 가인에게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라고 하셨는데, 이건 마치 개구리가 도약을 위해 웅크리듯 죄가 순식간에 사람을 덮치기 위해 그러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가인의 마음 문 앞에 있는 죄에 대해 경계하신 것입니다. 이어 ‘죄가 너를 원하나’라고 하셨는데 이건 3장에서 여인이 ‘너는 남편을 원하나’에 사용되었던 단어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그 때 ‘원하다’ 단어의 의미가 뭐라고 했죠?”
“손아귀에 넣는다”
“맞습니다. 사람이 죄를 향해 마음 문을 열면 죄가 순식간에 덮쳐 사람을 손아귀에 넣으려고 하지만 그렇게 당하지 말고 죄를 잘 다스리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죄를 다스리는 것일까요?”
“마음 문을 열지 않는 것요”
“그렇죠, 죄를 향해 마음 문을 열지 않는다면 원천봉쇄가 되겠죠. 그러나 사람이 그럴 수 있을까요?”
“죄와 싸워 이겨야죠”
“죄와 싸워 이겨 보셨어요?”
“아뇨”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 . .”
“죄를 다스릴 수 있는 분에게 의지하는 겁니다. 죄가 겁내는 분에게 나를 맡기는 겁니다. 그런 분이 누구실까요?”
“예수님”
“맞습니다. 죄는 우리를 덮치고 손아귀에 넣으려고 하지만 죄에 사로잡힌 우리를 해방시킨 분이 예수님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죄를 없앨 수는 없지만 우리에게 다가오는 죄가 우리를 완전히 사로잡지 못하도록 관리할 수는 있습니다. 예수님이 도와 주실 때. 성경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는데, ‘예수님, 도와주세요’하는 것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님 믿고 한 번 경험하고 마는 게 아니라 날마다 경험하는 지속적인 은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