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미리 가인에게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8절에 보면 가인은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기 위해 일을 진행합니다. ‘아벨에게 말하고’ 무엇을 말했는지는 구체적으로 모릅니다. 그러나 최소 들판으로 나가자고 했겠지요. 왜 들판으로 나가자고 했을까요?”
“죽이려고요”
“예, 죽이고 싶은 마음도 끔찍하지만 죽이고 싶은 마음만으로는 죽일 수 없습니다. 그 마음을 다스리지 않고 가만히 두니까 죽이는 준비를 하게 됩니다. 그 때까지 당사자는 잘 모릅니다. 결국 그 마음이 당사자를 삼키고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군요”
“결국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쳐죽였다’는 건 때려 죽였다는 의미입니다. 돌로 그랬든지, 죽도록 때렸든지 참 끔찍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끔찍하네요”
“아마 가인도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놀랐을 것입니다. 최초의 살인 사건이 자기 손에 의해 벌어졌으니까요. 처참하게 피를 흘리며 고통스럽게 죽는 사람은 처음 봤을 테니까요”
“바로 그랬는지 시간 간격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이 가인에게 아벨이 어디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부모인 아담과 하와가 그랬던 것처럼 가인은 용서를 구하지 않고 회피하고 변명합니다. 하나님은 10절에서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역시 하나님이라 끔찍하게 피흘린 죽음을 문학적으로 표현하셨구나’가 아닙니다. 이건 문학적 표현이 아니라 물리적 표현입니다. 지금 문학적 표현을 할 분위기가 아니잖아요. 사람에겐 들을 수 있는 소리의 범위가 있습니다. 그 범위를 벗어나면 소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소리가 있습니다. 지구가 자전하거나 공전하는 속도가 엄청나지만 인간은 전혀 느끼지도 못하고 그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합니다. 엄청난 굉음일텐데 말이죠. 그런 것처럼 압제당한 약하고 가난한 자의 신음과 원망이 화려한 궁궐이나 고급 주택에 살고 있는 압제자에게는 들리지 않을 지 모르겠지만 하나님께는 들립니다. 성경에는 곳곳에 그런 표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에 대해 심판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마치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거나, 하나님이 창조하셨더라도 그냥 사람이나 자연이나 알아서 돌아가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경제학에도 ‘보이지 않는 손’이란 게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마지막 날에 결국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12절에서 가인에게 저주를 내리십니다. 안정적으로 살지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건 실제적으로도 그렇지만 심적으로 안정을 누리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가인은 너무 두려워 자신의 두려움을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자기도 살인을 당할까봐 두렵다는 거죠. 자기는 사람을 죽여 놓고 자기가 죽임당할 것이 두려워 고통스럽다는 걸 호소하다니요. 가인에게 이미 저주가 임했음을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다른 사람으로부터 죽임을 당하지 않을 수 있는 표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게 무슨 표인가요?”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으니 그게 뭔지 알 수 없습니다. 솔직히 우리는 그게 궁금하긴 하지만 성경이 관심없다는 건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고 알 필요도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것은 그 다음 가인의 태도입니다. 17절에 보면 가인은 성을 쌓았습니다. 누가 자기를 죽일까봐 불안하니까 성을 쌓은거죠. 높고 견고한 성은 아니겠지만 인류 최초의 성입니다. 이 성은 단절을 의미합니다. 자신은 안전을 확보할지 모르겠지만 상대방에게는 위압감을 주죠. 사람 사이에 좋은 관계는 절로 맺어지는 게 아니죠. 마음을 들이고 시간을 내고 수고해야 합니다. 내가 좋은 마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면 언제나 좋은 관계가 잘 되던가요?”
“아뇨, 오해받기도 하고, 좀 그렇죠”
“전에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 하나님이 저주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네가 수고해도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서 수고한 만큼 얻지 못할 것이다. 사람 사이에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없도록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마구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리신 저주가 사람 사이에도 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거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