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절에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했는데, 사람들은 원래부터 육신이었지요. 이 말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가치를 더 이상 추구하지 않고 육신적 가치를 추구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그나마 의미있는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었는데 그들마저 하나님을 저버리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들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인데 피조물이 그런 태도를 보이는 건 단순한 거역 정도가 아니라 반역이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처벌해야되겠죠”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는데 멸망시키시기로 한 것입니다. 3절 마지막에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는 구절이 있지요?”
“예”
“이걸 근거로 하나님이 인간이 120년까지 살 수 있도록 하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진짜요? 하나님이 사람의 수명을 120년으로 정했다고요?”
“솔깃할 수도 있는 이 말씀은 인간의 수명이 120년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홍수 전에는 9백년 이상 산 사람들이 수두룩했고, 홍수 이후에도 120년 넘게 산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건 앞으로 120년 뒤에 세상을 심판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예고인 셈입니다”
“4절에 ‘네피림’이란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 단어는 ‘폭행하는 사람’이란 의미입니다. 쉽게 말하면 싸움을 전문으로 하는 ‘전사(戰士)’인데, 중세의 기사처럼 이런 사람들이 계급을 이룰 정도로 전쟁과 싸움이 난무하는 악한 세상이 되었다는 걸 의미합니다. 6절에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것을 ‘한탄하시고 근심하셨다’고 나옵니다. 하나님이 일이 이렇게 꼬일 줄 전혀 모르셨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 그만큼 안타까우셨다는 표현입니다. 부모가 자식의 비행 앞에 ‘내가 너를 왜 낳았을까?’라고 말하는 건 진짜 자식을 낳은 걸 후회하는 게 아니라 ‘네가 왜 이런 못된 짓을 했느냐?’라는 탄식을 강조한 것이죠. 신의 마음을 정확히 묘사할 수 없어 사람의 마음을 빌어 표현한 것입니다. 7절에 홍수 심판의 대상이 나옵니다.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입니다”
“물고기는 없네요”
“홍수인데 물고기가 빠져 죽을 리가 없잖아요? 방주에 물고기까지 넣으려면 엄청난 크기의 수조를 만들어야 했을 거고요”
“아, 그러네요 ㅎㅎ. 그러면 곤충은요? 파리나 모기 같은?”
“글쎄요. 파리나 모기는 짐승의 몸에 붙어서 방주에 들어갈 수도 있을텐데… 솔직히 그건 모르겠네요”
“8절에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성경에 ‘은혜’라는 단어가 여기에 처음 나옵니다. 이걸 영어 성경으로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패드에 흠정역 영어성경을 썼다.
Noah found grace in the eyes of the LORD.
“직역하면 ‘노아는 하나님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했다’ 입니다. 참 아름다운 문학적 표현이지요.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노아가 정말 하나님의 눈을 본 건 아니란 말입니다. 다만 순서상 정리를 해보면 먼저 하나님이 노아를 은혜로운 눈으로 보셨고, 그런 시선을 받은 노아가 하나님의 눈을 보니 은혜가 있더란 말입니다. 그냥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건데 이렇게 표현한 겁니다”
“이런 표현 좋은 것 같아요”
“그럼 노아는 어떻게 은혜를 입을 수 있었을까 생각하게 되는데요. 9절에 보면 노아는 당대에 의인이고 완전한 사람이었다고 나옵니다. ‘아, 그러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구나’ 이렇게 되면 복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이 8절을 먼저 쓴 것입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눈에 들 만큼 의롭고 흠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니요”
“예, 없습니다. 신을 만족시킬 만한 사람은 없지요. 하나님이 먼저 은혜 가득한 눈으로 노아를 대하셨고, 노아가 그 은혜를 입어 그런 세상에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그런 사람을 의롭다고 하고 흠이 없다고 합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복음입니다. 사람이 도저히 이를 수 없는 수준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니 그냥 신을 의지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받을 수 있는 내용이니까 복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