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오전 비신자 여성 성경공부 모임을 했다.
두 시간 일찍 낮은울타리에 와서 먼저 난방 온도를 올리고 기도상에서 기도했다.
이어 앞뒤 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며 청소한 후 들어왔을 때 커피 향이 나도록 커피를 내렸다.
평소보다 양이 많은 커피를 들고 오늘 공부할 내용을 점검했다.
점검 중 아침에 전해 들은 아는 분의 장례일정에 관한 이야기를 문자로 나누고, 남해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기도 했다.
아마 그 때 두 사람이 도착했나 보다.
낮은울타리 초인종은 울리지 않는다.
이전 사람이 어떤 조치를 했는지 울리지 않았다.
뚜껑을 열고 고쳐보려 했으나 아무리 힘을 써도 뚜껑을 열 수 없었다.
사실 별로 불편한 점이 없기 때문이다.
오시는 분은 알아서 노크를 한다.
공교롭게도 내가 방에서 통화를 하고 있었던 때와 겹쳤나 보다.
아니면 평소와는 달리 너무 조용하게 두드렸든가.
인기척을 느껴 현관문에 있는 어안렌즈로 봤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이분들과의 모임을 너무 사모한 나머지 환청이 들리는 것인가?’ 생각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아직 오지 않은 줄 알고 계단으로 가서 기다렸다고 했다.
내가 들은 것은 정시가 넘고 이분들이 ‘목사님이 아직 오시지 않을 리가 없는데’라며 다시 두드렸을 때였다.
두 분이 들어오며 서로 대화한다.
“거봐, 안에 계시다니까. 오시지 않을 리가 없지”
“초인종을 눌러도 인기척이 없으니까”
“저는 거의 두 시간 전부터 와있었는데요. 저도 인기척을 느껴서 봤는데 아무도 계시지 않던데요”
“계단에 있었어요”
“그러니 안보이죠. 두드리고는 왜 계단으로 가셨어요?”
“안 계신줄 알고…”
“아무튼 잘 오셨습니다. 커피 드릴까요?”
“예”
“저는 믹스커피 주세요. 정신을 차려야 하거든요”
커피를 준비하는 동안 두 분이 앉아서 대화한다.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들의 이야기이다.
누구 집 아이는 성적이 어떻고, 누구 집 아이는 어떤 학원에 다니고, 누구 집 아이는 학원비가 얼마나 되고, 누구 집 아이는 별로 놀지 않는다는 이야기 등등.
이어서 자기 집 아이들이 성적이 좋지 않은 이야기, 공부 양이 적은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더니 결국 오랜 시간 앉아 있어야 성적이 좋더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적용은 ‘오늘부터 밤 10시에 재우면 안되고 12시까지 앉혀 놔야겠다’였다.
커피를 건넨 후 나도 커피를 들고 그들 곁에 앉았다.
“저도 아이 넷을 키우면서 한 명은 공부를 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무도 하지 않는 거예요. 한 명은 악기를 전공할 줄 알았어요. 그것도 아무도 하지 않아요. 다들 예체능이라 학원비는 많이 드니까 어떤 때는 슬슬 짜증이 나기도 하고요”
“목사님도 그러세요?”
“저도 사람이고 아빠인데요. 어제도 딸들에게 짜증을 좀 냈어요. 그리고 방에 들어가서 생각을 해보니 제가 얘네들에게 사랑을 줄 수 있는 날들이 몇 년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얼마 있지 않아 하나씩 제 품을 떠날 테니까요. 솔직히 공부가 잘 안되고 성적이 좋지 않으면 자기들이 가장 속상하겠지요. 해도 안되는 걸 어떡하겠어요? 어떻게 해야되는지 잘 모르겠는 걸 어떡해요? 분명히 봤는데 인출이 안되는 걸 어떡해요? 우리도 다 겪은 일이잖아요? 오직 부모만 그래도 받아 주고, 귀하다고 말해 줄 수 있는 존재잖아요.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세상에 누가 그렇게 해주겠어요? 그래서 딸들에게 사과했어요. 미안하다고. 어젯밤도 각자 폰으로 드라마 보느라고 늦게 잤을테니 아침에 늦잠 자라고 조용히 나왔지요.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좀더 받아 주세요”
‘사랑해 줄 수 있는 날들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말에 처음엔 ‘웬 드라마 제목같은 표현?’이란 눈치더니 뒷 이야기를 들으며 다들 표정이 진지해졌다.
“목사님 이야기를 들으니 그러네요. 오늘부터 12시까지 잡아 놓으려 했는데 그러지 말아야겠어요”
“목사님의 이런 모습이 좋아요. 목사님이 정장하고 넥타이 매고 근엄한 표정이면 멀게 느껴질텐데, 자녀양육으로 고민하는 것도 솔직하게 말씀해 주시니까 훨씬 가깝게 느껴져요. 저희에게 도움도 되고요”
다른 분이 약간 놀리듯 말했다.
“이건 완전히 마치는 분위기인데요”
성경공부를 마치며 내가 소감을 물을 때나 나오는 대화였기 때문이다.
내가 말했다.
“오랜만에 모이셨는데 그러면 안되죠. 공부하러 갈까요?”
자리를 옮겨 앉았다.
모니터에 창세기 11장을 띄웠다.
“오늘 바벨탑 이야기를 볼텐데요, 그 내용이 창세기 11장에 나옵니다. 저는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동안 한번 읽어 보세요”
아침에 마신 커피와 콜라가 이뇨작용을 활발하게 만들었다.
공부하다가 중간에 가느니 시작 전에 다녀오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지난 시간에 노아의 방주에 대해 공부했는데 못들은 분이 계시니 요점만 정리하겠습니다. 방주는 원래 ‘상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똑같이 십계명 돌판을 담은 법궤를 의미할 때도 쓰였습니다. ‘방주’나 ‘법궤’의 공통점은 ‘구원’이 이루어지는 통로라는 것입니다. ‘법궤’를 통해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이 법궤 뚜껑인 ‘시은소’에서 이스라엘의 죄를 사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직사각형 성전 단면도를 그리고 상부에 정사각형으로 지극히 거룩한 장소라는 의미인 지성소를 표시했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 법궤가 있는 지성소에 들어가서 백성의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건 ‘속죄’가 이루어졌다는 말과 같습니다. 죄가 해결되지 않으면 구원은 없기 때문입니다. 노아가 의인이라고 했지만 그가 죄를 짓지 않는 거룩한 삶을 살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은 의인이란 의미를 한번도 그렇게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창세기 6장 8절을 볼까요?”
처음 패드 화면엔 바벨탑이 나오는 창세기 11장이 나왔지만 화면을 손가락으로 밀어내려 6장이 나오게 했다.
“8절에 보면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일률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의지하는 삶을 산 사람을 ‘의인’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속죄’를 해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신 감당해 주셨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방주, 법궤, 예수님은 한 맥락입니다. 로마서 8장 39절에는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통로로 전달된 하나님의 사랑은 끊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가장 안전한 구원의 방주가 된다는 말입니다. 옛날 노아시대처럼 정말 방주에 들어갈 필요도 없고, 1년에 한번 지성소에 들어갈 필요도 없고, 그냥 예수님만 믿으면 됩니다. 정말 쉽죠? 여기까지 이해되세요?”
“예”
“제가 설명을 잘한 걸까요, 여러분이 이해를 잘한 걸까요?”
“둘 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