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그랄 땅에서 자기 아내 사라를 향해 ‘누이’라고 소개합니다. 이거 어디서 들었던 같지 않으세요?”
“전에 이집트에서 했던 것 같은데요”
“예,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오자마자 기근이 들어서 식량 문제로 이집트에 갔을 때 일어났던 일이죠. 25년 전 이야기입니다. 거기서 이집트 왕 파라오가 아브라함의 아내를 후궁으로 삼으려 데려가는 바람에 민망한 일이 벌어졌지요. 그런 일이 또 벌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정말 아내를 보호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자기만 생각하는 비열한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몇 가지 더 생각할 부분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했습니까?”
“아내라고 하면 자기를 죽이고 빼앗아 갈까봐요”
“아브라함이 왜 그렇게 생각할까요?”
“자기 아내가 이쁘니까요”
“지금 사라가 몇 살이라고 했지요? 이 앞에서 자기가 늙었고 생리가 끊어졌다고 한 것 기억하시죠?”
“어, 그러네요. 그럼 나이가 많은 건데”
“이 앞에서 사라의 나이가 90세라고 했습니다”
다들 표정이 조금 묘해졌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가 90이 넘었는데도 너무 예쁜 겁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이 자기 아내를 빼앗기 위해 자기를 죽일 것 같은 공포를 느낄 정도로”
“그러면 사라 입장에서는 좋아해야 되는 거네요”
“그렇죠. 아브라함은 90이 된 아내를 아직도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진정한 애처가인 겁니다”
“와, 사라는 행복한 거네요”
“부부사이가 그러면 너무 좋은 거죠. 그런데 문제는 그랄 왕 아비멜렉입니다. ‘아비멜렉’은 블레셋 왕의 호칭입니다. 몽골의 왕을 ‘칸’이라고 부르고, 이집트 왕의 호칭이 ‘파라오’인 것처럼요. 그래서 한참 뒤에 또 ‘아비멜렉’이 나오는데 같은 사람이 아니라 그냥 블레셋의 다른 왕입니다. ‘블레셋’은 요즘 말로 하면 ‘팔레스타인’입니다. 뉴스에 가끔 이스라엘하고 서로 미사일도 쏘고 대치한다는 바로 그 민족입니다. 그랄은 블레셋 민족의 성읍 중 하나였습니다”
“아비멜렉이 왕이라면 얼마든지 젊고 예쁜 여자들을 후궁으로 데려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죠”
“그런데 왜 굳이 90이 되고 생리도 끊어져 피부의 탄력도 떨어진 사라를 이쁘게 보고 후궁으로 데려가려고 했을까요? 요즘 마스크 쓰듯이 당시에도 베일로 얼굴을 가려 잘 알아 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나이가 있는데 말입니다”
“듣고 보니 좀 이상하네요”
“옛날 왕 중에는 방탕한 사람도 많이 있었으니까 당시 아비멜렉도 성적인 취향이 이상한 놈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아비멜렉만 그런 게 아니라 그랄 사람들이나 그 신하들도 사라의 미모를 인정했기에 그런 일이 생길 수 있었습니다. 그랄 사람들 사이에 사라가 이쁘다는 소문이 돌고 그 소문이 아비멜렉의 귀에까지 들렸으니까 그랬을 겁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분들의 표정이 조금 묘해졌다.
“소돔과 고모라처럼 도시 전체가 이상한 것일까요?”
“좀 이상하긴 하네요”
“이 앞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무슨 약속을 하셨지요?”
“아들을 낳게 해준다고요”
“하나님이 생리가 끊어진 사라에게 아들을 낳게 해 주신다고 했는데 비실비실한 아들을 낳게 하실까요?”
“아니요”
“건강한 아들을 낳으려면 어떤 몸이어야 하나요?”
“엄마가 젊고 건강해야지요”
“그렇죠. 만약 노산이면 당시로는 아이를 낳고도 산모가 사망할 수도 있고, 아기에게 젖을 물릴 수도 없는 일이 생기니까요”
“그럼 어떻게 된 건가요?”
“하나님이 사라의 몸을 건강한 아들을 낳을 수 있는 젊은 여인의 몸처럼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다시 생리를 해야 아들을 낳을 수 있잖아요. 아들을 해산할 체력이 있어야 하잖아요. 낳은 아들에게 젖을 물릴 수 있는 건강한 몸이어야 하잖아요. 사라의 몸이 그렇게 변화되었으니 아브라함이 걱정한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상식이 있는데 사라의 몸이 예전같다면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지요”
“그럼, 사라가 회춘한 거네요”
“그렇죠”
“어떻게 그런 일이…”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만드신 분이고, 죽은 사람도 살리시는 분인데, 그런 일에 비하면 회춘시키는 것은 오히려 다른 일보다는 더 쉬운 일 아닐까요?”
“그러네요”
교회에 다니면서 이 모임을 소개한 분이 말했다.
“전 지금 좀 얼떨떨하거든요. 이 부분을 읽기도 하고, 설교도 들어봤지만 한번도 이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어서요”
“그런가요? 그럼 이 부분을 어떻게 받아들이셨어요?”
“그냥 그런가 보다 했지요”
“저는 아비멜렉의 태도가 이해가 안되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를 데려다가 뭐하려고? 그런데 앞장에 하나님이 이삭 출산 약속을 하셨고, 뒷장에서 이삭이 출산합니다. 그러면 중간에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할까 생각한 거죠. 그럴려면 여기서 사라가 회춘하는 일이 일어나야 되는 거예요. 성경은 ‘사라가 회춘했다’라고 쓰지 않고 아비멜렉 사건을 통해서 사라의 회춘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할 만한 정도였다라는 걸 증명한 거죠. 이게 훨씬 합리적이고 상식적이지 않은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