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글은 2018년 8월 1일에 썼던 글이다. 정형돈이 공황장애 재발로 방송활동을 하지 못한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아팠다. 나도 공황장애를 앓았고, 현재 달래고 사는 사람으로서 공감되는 바가 있다. 그가 몸과 마음의 건강을 잘 회복하고 행복하게 살길 바란다.
무한도전은 아주 독특한 컨셉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예능 프로그램의 대세는 토크쇼였다.
아주 잘 생기거나 호감을 받는 사람이 진행하면서
초대받은 유명 게스트의 숨겨진 일화나 인간적인 모습, 심지어는 망가지는 모습까지 보이도록 하는 구성이었다.
그런데 잘 생기거나 능력이 있어 보이지 않고 오히려 평균 이하처럼 보이는 남성들이 진행하는 무한도전은 수 년 동안 최고의 프로그램으로 선정되었고, 말 그대로 국민방송이었다.
한 명의 결원이 생겼을 때, 그 결원을 선발하는 과정이 방송되고 화제가 될 정도로 국민들의 관심을 모았다.
모델, 가수, 개그맨 등 여러 사람이 무한도전의 멤버가 되길 지원했다.
그건 무한도전이라는 최고의 프로그램이자 탄탄한 무대를 통해 자신을 알리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정형돈이란 멤버는 공황장애를 앓은 후 오히려 갑작스러운 자진하차를 발표했다.
많은 사람이 공황장애가 심해서 앞으로 방송을 하기 어려운 모양이라 예측했다.
하지만 얼마 있지 않아 정형돈은 다른 프로그램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이런 정형돈의 처신에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했다.
다시 방송 출연을 한다면 자신을 위해서라도 최고 프로그램인 무한도전에 먼저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닌가?
무한도전에 출연하지 않으면서 다른 프로그램에 나가는 것은 자신을 키워준 무한도전에 대한 배신 아닌가?
하지만 나는 정형돈의 선택이 이해된다.
정형돈은 무한도전에서 한동안 캐릭터를 잡지 못해 곤란을 겪었다.
진행은 최고의 MC 유재석이 있고,
신경질적 캐릭터는 박명수,
4차원 캐릭터에는 노홍철,
얍삽하게 주워 먹는 캐릭터에는 하하,
둔하다는 이유로 당하면서 먹방에 능한 정준하가 있었다.
이들 사이에서 정형돈은 웃기는 것 빼고는 다 잘하는 개그맨으로 늘 구박받고 고민하는 어정쩡한 캐릭터였다.
그런 정형돈을 새롭게 보게 한 것은 무한도전 가요제였다.
무한도전 가요제에서 정형돈과 짝을 이룬 상대는
세계가 인정한 음악성과 스타성을 가진 지디,
아주 독특한 장르와 개성을 가진 정재형,
그리고 색깔이 분명하고 쉽지 않은 음악을 하는 혁오 밴드였다.
대단한 그들을 만나서 에피소드를 만들고, 그들의 음악성을 받아들이면서 오히려 어떤 때에는 그들을 리드하는 제안을 하고, 무엇보다 가요제에서 여느 가수라도 소화하기 어려운(적어도 내 눈엔 그렇게 보였다) 노래를 표현해 내는 것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
그것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얼마나 진지하고 치밀하게 고민하고 준비하고 연습하는 사람인지 보았다.
정형돈은 보통 끼가 있는 사람이 아니게 보였다.
그는 다른 프로그램에서 아이돌 그룹들을 들었다 놨다 하는 진행실력을 보이기도 한다.
정형돈으로서는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안전한 무한도전으로 복귀할 것인가, 아니면 무한도전의 확실한 캐릭터들 속에서
어쩌다가 만들어져서 갇혀버린 캐릭터가 아닌 자신이 마음껏 표현하고 싶은 끼와 재능을 발휘할 다른 무대를 찾을 것인가?
보통 사람들은, 그리고 주변에서는 대부분 무한도전으로의 복귀를 권했을 것이다.
그런데 40세가 되는 정형돈은 다른 선택을 했다.
나는 요즘 정형돈이 행복해 보인다.
정형돈의 진지하고 치밀하고 고민하는 성격이 낙천적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마도 정형돈은 나처럼 간간이 안정제를 먹으며 지낼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자기가 하고 싶어 하는 일, 드러내고 싶은 자신을 표현하며 사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 중에는 안전한 틀 안에서 사는 것을 편안한 것으로, 성공한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 틀을 답답하게 여기고 자신을 찾고 자신다운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다.
편안하지 않더라도, 심지어 다른 사람들의 비난을 받더라도.
정형돈은 후자 쪽의 사람인 것 같다.
그래서 정형돈을 이해하고 응원한다.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세상은 무한도전의 캐릭터처럼 분명해야만 살아남는 곳이 아니다.
이 글을 읽고 나도 틀을 벗어나서 자유를 찾아보리라며 객기를 부리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우선은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이 먼저다.
오히려 세상은 정형돈같이 어정쩡한 캐릭터가 훨씬 많은 곳이 아닌가 싶다.
실상은 물에 물 탄 듯해서 신앙도 밋밋하고 생활도 밋밋한 것 같은 그 어정쩡한 캐릭터들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는 버팀목들이다.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땅에 들어가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룬 사람들도 결국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이리저리 흔들렸던 이름 없고 어정쩡한 백성들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정쩡한 캐릭터들, 만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