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은 언제 갈아야 할까요?”
“무뎌졌을 때요”
“자르고 난 다음에 갈아도 되지 않을까요?”
“잘 자르는 게 목적이니까 자르기 전에 먼저 갈아야죠”
“정말 지혜로운 분별이고 대답입니다. 칼은 쉽게 잘 자르는 게 목적이니까 무언가를 자르기 전에 먼저 날부터 갈아야겠지요. 앞에 두든 뒤에 두든 똑같지 않고 분명 우선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마술쇼 같은 걸 보면 바구니에서 뱀이 나올 때 술객이 피리를 불어 뱀을 제어합니다.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 기다리다가 술객이 피리를 불기도 전에 다른 사람이 뱀에 물리면 어떻게 될까요?”
“쇼고 뭐고 다 소용없죠”
“사람들은 술객의 피리소리를 듣고 싶은 게 아니라 술객이 뱀을 제어하는 걸 보고 싶은 거니까요. 10절과 11절은 시기의 중요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언행이라도 그 적절한 때가 있다는 겁니다. 그 때가 어긋나면 언행을 했더라도 하지 않은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 적절한 시기를 맞추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런데 살아보니 어떠세요? 그 시기를 맞추기가 쉽던가요?’
“너무 어렵죠”
“목사인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는 정말 타이밍이 중요하거든요. 그런데 그 때를 맞추는 게 쉽지 않습니다. 사람이 다르고 사정이 다르니 획일적으로 적용할 수도 없죠. 그래서 매번 어렵습니다. 이 시기를 분별할 수 있으면 목회가 좀 쉬워질라나요? ㅎㅎ 그 적당한 때를 알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우매함입니다. 때에 대한 인간의 가장 결정적인 우매함은 구원의 문이 언제든 열려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겁니다. 정말 예수님이 진짜 유일한 구원자라면 자신이 죽기 전에 언제든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하지만 개인적 종말이든 지구의 종말이든 그 종말은 갑자기 다가오고, 그 때 구원의 문이 이미 닫혔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12절부터 14절에는 우매자의 말에 대한 이야기가 반복해서 나옵니다. 우매자의 말이 어떤 결과를 초래한다고 말합니까?”
“자기를 삼키고, 심히 미친 것이고, 장래 일을 알지 못한다고 하네요”
“앞의 두 표현은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은데, ‘장래 일을 알지 못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글쎄요?”
“전도서 앞쪽에서 여러 번 나왔던 표현입니다. 기억을 한번 더듬어 보세요”
“죽음?”
“맞습니다. 어리석은 말로 죽음을 초래한다는 겁니다. 자기를 삼키고, 미친 것이고, 죽음을 부른다는 것이 점층적 표현처럼 보이지만 의미는 동일합니다. 자기 스스로 망한다는 뜻이지요. 이처럼 우매한 자는 말만 해도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그럼 우매한 자가 자기 말을 행하기 위해 수고까지 하면 어떻게 될까요?”
“더 안좋게 될 것 같은데요”
“말 그대로 설상가상이겠지요. 이 코미디같은 내용을 15절이 언급합니다. 우매한 자의 수고는 ‘자신을 피곤하게 할 뿐이라’고 했습니다. 수고했으니 좋은 결과가 나오면 좋은데 그냥 수고만 했을 뿐 무익하다는 겁니다. 시간과 수고가 투자되었는데 무익하다면 실제로는 자신이나 타인에게 피해를 준 거죠. 그들의 행태에 대한 안타까움을 전도자는 15절 마지막에 비유적으로 표현합니다. ‘성읍에 들어갈 줄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일을 할 때가 있으면 쉴 때가 있는데 우매한 자들은 10절과 11절에 언급된 것처럼 때를 모르고 헛된 수고를 자기 몸이 상하도록 한다는 겁니다. 또 하루 일을 마쳤으면 성읍 안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 돌아가는 길도 모른답니다. 정작 자기가 가야할 길을 모르는 거죠. 마치 도시에서 성공을 좇아 일에 중독된 현대인을 보는 것 같습니다. 전도자는 우매한 자의 행태를 지적하며 인간이 진정 가야할 길에 대한 질문을 갖게 합니다. 우리 인간이 진정 가야할 길이 무엇일까요?”
“믿음의 길?”
“맞습니다. 하루 일을 마친 사람이 집으로 가서 쉬듯 인간 존재와 생명의 근본이고 고향인 하나님께로 향하는 길로 가야지요.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길이 되십니다. 전도서는 정말 틈틈이 전도하는 책입니다”
“16절부터 20절은 왕과 신하가 지혜로운가 우매한가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16절과 17절이 두 나라를 대조하는데, 평소 우리가 사용하는 표현과 좀 달라 주의 깊게 봐야 하는 건 왕에 대한 묘사입니다. 16절에 왕이 ‘어리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왕이 어리면 엉뚱한 사람이 권세를 휘두른 예를 찾아볼 수 있지만, 이 말은 단순히 나이가 어리다는 말보다는 왕으로서의 품격이나 지혜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마찬가지로 17절의 ‘귀족들의 아들’도 귀족의 아들이니까 왕으로서 자격이 충분해서 나라를 잘 다스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지혜와 품격이 있다는 뜻입니다. 왕이 지혜롭고 품격이 있으면 대신들이 먹기는 먹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라 열심히 일하기 위해 먹는다는 겁니다. 대신 왕이 지혜가 없고 우매하면 대신들이 백성을 돌보지 않고 아침부터 잔치를 벌이며 사리사욕을 채우게 될 것입니다. 그런 나라가 잘 될 리가 없죠. 그런 나라의 실태가 18절과 19절에 나옵니다. 나라든 집안이든 부지런히 일하고 살림을 점검하지 않으니 곳곳에 새는 곳이 나오고 기둥이 무너진다는 거죠. 그런데도 당장의 기쁨을 위해 잔치를 벌이고 술을 마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말합니다. ‘돈은 범사에 이용되느니라’는 말은 ‘돈이면 다 된다’는 의미입니다. 배금주의를 가장 잘 표현한 말이죠. 그들이 무엇을 기쁨으로 삼고 무엇을 의지하는지 가리지 않고 드러낸 표현입니다. 그러나 개인의 죽음이나 마지막 심판의 때에도 돈으로 피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죠. 말도 안되죠”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인생의 종말이 갑자기 다가왔을 때 자신의 가치관이 얼마나 잘못되었나 깨닫겠지만 그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마지막 20절은 우리말 속담과 좀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러네요.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와 비슷합니다”
“그렇죠? 사람 사는 세상은 어디나 비슷한 것 같습니다. 특히 10장 내내 반복해서 나오는 내용이 우매자의 말에 대한 것입니다. 우매자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감추지 못하고 말로 드러낸다고 했습니다. 생각하면 결국 말로 나오게 되고 나온 말은 전파되고 행동으로 옮겨지니까요. 우매자뿐만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지요.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결국 내가 생각했던 말이지 않습니까?”
“맞아요. 나도 모르게 나오더라고요”
“불쑥 들어온 생각을 거르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입에서 나옵니다. 생각이 많으면 결국 행동으로 옮기게 되죠. 그래서 예수님도 생각으로 음욕이나 탐욕을 품지 말라고 경계하신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왕을 저주하는 말을 했다가는 죽임을 당하죠.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서라도 생각조심, 말조심을 하라는 겁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11장이 짧아서 다음 시간에는 전도서를 다 마치겠는데요?”
“예, 그럴 것 같습니다”
“그럼 책거리 하는 건가요?”
“당연히 해야죠. 다음 주에는 조금 늦게 시작해서 같이 저녁식사를 하면 좋겠습니다”
“저희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