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까지 한 번 모임에 한 장 정도 진도를 나갔다.
그런데 11장이 10절밖에 되지 않고 12장도 14절로 짧아 오늘 한꺼번에 두 장을 공부하고 전도서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그러나 세상 일이 늘 계획대로 되는 건 아니다.
오전부터 일정이 있었고, 걸려온 전화로 갑작스런 일이 생기기도 했다.
때문에 낮은울타리에 10분 전에 겨우 도착했다.
도착해서도 성경공부 준비를 하지 못하고 급한 서류를 팩스로 보냈다.
그 때 초인종이 울렸다.
얼른 뛰어나가 문을 여니 두 분이 환한 얼굴로 들어오셨다.
오늘 전도서를 마친다고 했으니 들어오면서부터 벌써 끝내고 오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밝은 두 분을 보며 덩달아 나도 분주했던 마음이 사라지고 기분이 좋아졌다.
“오늘은 약속대로 마지막까지 가보겠습니다. 일단 11장을 한 절씩 읽겠습니다”
보통 교회에서는 설교 본문이나 성경공부 본문을 읽을 때 마지막 절은 같이 읽는다.
그러나 낮은울타리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읽는 순서를 정해주고 첫 절을 내가 읽으면서 어떤 분위기 어떤 속도로 읽을 것인지 분위기를 만든다.
그리고 그 순서대로 한 절씩만 읽는다.
정확하게 분량이 맞을 때도 있지만 내가 마지막 절을 읽게 될 경우도 있다.
마지막 절을 같이 읽지 않아 어색함을 느끼는 사람들은 기존 신자들이다.
그만큼 우리는 종교적 습관에 길들여져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뭔가 이상하게 여기고 심지어 잘못되었다고 여기기도 한다.
진리여부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데도 말이다.
낮은울타리 모임을 하며 나도 많이 느끼고 배우는 부분이다.
“1절에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라고 했습니다. 그 지역에선 떡이 아니라 빵이겠지요. 빵을 물에 던지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물고기 밥을 주라는 것도 아닐텐데요. 그런데 여러 날 후에는 도로 찾을 거라고 합니다. 물 위에 빵을 던져 흘려 보냈는데 그 빵을 어떻게 도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이건 비유인데요, 그 의미를 2절에 말합니다.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누라’는 겁니다. 이웃과 나누라는 건데요. 한두 명도 아니고 일곱이나 여덟과 나누는 건 쉽지 않습니다. 좀더 적극적인 나눔과 구제를 권면합니다. 이어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내가 지금은 나눌 수 있는 형편인지 몰라도 미래에는 어려움을 당해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될지 모른다는 거죠. 그 때 다른 사람의 도움과 나눔을 통해 내가 또 사는 겁니다. 우리가 살면서 그런 걸 느끼지 않으세요? 내가 수고해서 번 것으로만, 내 힘으로만 사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요? 사는 날이 많아질 수록 이웃과 서로 돕고 나누는 것을 통해 산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잠언 11장 25절에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남을 돕느라 분명히 내 시간과 재물을 손해 봤는데, 결국 그것 이상으로 채워지는 걸 경험하는 것이 인생인 것 같습니다. ‘비웠더니 오히려 더 채워졌다’는 배우는 게 인생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전도자가 이걸 권하는 거예요. 왜일까요? 하나님이 인간을 그렇게 살도록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누고 사는 게 순리라는 거죠”
“맞아요. 나누면 주는 사람도 즐겁고 받는 사람도 즐거우니까요. 사람은 그렇게 살아야죠”
“사람들은 돈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손익을 많이 따지지요. 하지만 또한 사람은 돈으로 살 수 없는 즐거움이나 유대감이 없어도 살 수 없습니다. 전도자는 작은 재물을 나눔으로 훨씬 더 큰 인생의 유익을 얻으라고 말하는 겁니다. 보십시오. 세상은 점점 더 발달하고 도시는 더 커지는데 사람들은 더 불행하고 외로워하는 것 같습니다. 전도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4절과 6절은 약간 속담 분위기를 내며 또다른 인생의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전도자는 인생 후배와 후손들에게 무엇을 권하는 것일까요? 한번 다시 읽고 생각해 보세요”
“부지런해야 한다는 걸 말하는 것 같습니다만”
“맞습니다. 1절과 2절이 나눔과 구제를 권면했다면, 4절과 6절은 게으름을 경계하고 근면을 권하고 있습니다. 4절은 더 좋은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핑계대며 정작 합당한 노력을 하지 않는 자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겁니다. 모든 조건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때는 없습니다. 신앙이나 교회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 중에 자기는 요즘 슬럼프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알고 보면 늘 슬럼프라고 합니다. 그건 슬럼프가 아니라 그냥 그 사람의 수준인 겁니다. 교회도 사람들이 모인 곳인데 어떻게 자기의 마음에 쏙 들겠습니까? 자기가 좋아서 결혼한 사람도 미울 때가 있고, 내가 나은 자식도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있는데 말이지요. 매예배마다 어떻게 감동과 깨달음이 넘치고, 매일마다 좋은 일만 생기겠습니까? 신앙은 이벤트가 아니라 생활이고 삶입니다. 일상이 어떻게 상승곡선만 그리겠습니까?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게 당연한 거죠. 비가 온다고 핑계대고, 햇볕이 뜨겁다고 핑계대면 농부가 어떻게 농사를 짓겠습니까? 일상이든 신앙이든 그냥 꾸준하고 성실하게 하는 것이 무언가를 이루는 순리입니다”
“사람이 구제와 나눔을 하고, 부지런히 살면 모두 성공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그런 일은 없죠”
“아마 청년들은 그럴 수 있다고 믿을 걸요? 역시 60가까이 인생을 사신 분들이라 ㅎㅎㅎ. 사람이 그렇게 살아도 성공하고 행복하게 살 수 없는 것은 사람이 아무리 애를 써도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3절과 5절에 바로 그 내용이 나옵니다. 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땅에 쏟아지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노력한다고 비가 오게 할 수 있나요?”
“불가능하죠”
“구름에 수분이 가득하면 비가 내리는 건 누가 그렇게 정했을까요?”
“하나님이죠”
“구름이 수분을 담는 용량과 시간을 누가 정했을까요?”
“역시 하나님이죠”
“농부가 비가 오든 햇볕이 뜨겁든 핑계하지 않고 밭에 나가 파종을 하고 열심히 일을 해도 비가 오지 않는다면 농사를 망칠 수밖에 없습니다. 이건 사람이 어쩔 수 없는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5절에도 ‘네가 바람의 길이를 아냐? 태아의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 아냐?’라고 묻는 것도 바로 그 부분이죠. 나누고 부지런히 살면 그 다음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6절 뒷부분에 그걸 말합니다. 사람이 한 가지 일만 하는 것도 아니고 한 가지 관계만 있는 것도 아닌데, 그 중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 다 잘 될는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혹 둘 다 잘 못될 수도 있는 거죠. 사람은 도리를 다하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기는 겁니다. 동양의 고사성어로 표현하자면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입니다”
“그러면 인생이 참 작아 보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게 인생의 실상입니다. 관측된 것만 천억 광년이라는 이 어마어마한 우주는 끝이 어디인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인간은 알지 못합니다. 크기로 보자면 지구는 그 우주의 먼지와도 같습니다. 그리고 그 지구 위에 아등바등 살고 있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그런 인간을 우주를 만드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사랑하고 의미있는 존재로 여겨 주신 것입니다. 인간의 작음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더 큰 것이죠. 7절과 8절은 그런 인간이 누리고 살라고 주신 내용이 나옵니다. 7절과 8절에 반복되고 있는 표현을 찾아 보시겠어요?”
“즐거움?”
“맞습니다. 태양을 보는 것이 뭐가 즐겁습니까? 좋은 리조트에 드러누워 시원한 음료를 마시고 있어야 즐겁지요. 그냥 여러 해 사는 것이 뭐가 즐거운 일입니까? 돈도 많이 벌고 자녀는 잘되야 즐겁지요. 이게 하나님이 기본적으로 즐겁게 누리라고 주신 행복의 조건과 인간이 변질시킨 부분입니다. ‘소확행’이란 말처럼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하나님이 주셨는데 욕심꾸러기 인간은 그걸 행복이라고 여기지 않고 다른 조건을 채우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그날의 즐거움을 놓치지 않고 누리며 살기를 바라신 겁니다. 하지만 8절 마지막은 또 인생의 어두운 부분을 경계합니다. ‘캄캄한 날들’이 많을 거라는 거죠. 그렇다고 우울하게만 살 수는 없습니다. 다가올 일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