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절에 보면 이삭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땅인 그랄에 살 때 농사를 지었는데 ‘100배’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정말 ‘100배’를 얻었을까요? 비교 대상이 무엇일까요? 바로 옆 땅의 수확보다 100배라는 말일까요? 일반적인 알곡이 익은 모양을 생각한다면 100배나 많은 알곡이 매달려 있는 게 가능할까요? 현금이야 갑자기 100배나 많아져도 그냥 은행에 넣을 수 있지만 곡물을 100배나 수확을 얻으면 그걸 어떻게 처리할 수 있을까요?”
기존 신자가 대답했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100배라고 하니 ‘정말 100배로 얻었나 보다.’, ‘이삭은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좋았겠다.’, ‘부럽다.’ 생각만 했네요.”
“성경은 고대 문학이므로 당시 문학적 표현이 담긴 걸 고려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신약에서 ‘복음을 전했더니 모든 사람이 다 믿었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정말 한 사람도 빠짐이 없다는 수학적 계산이 아니라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관용적인 과장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여기에서의 100배도 평소 수확량보다 훨씬 많게 거둔 것이라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그럼 성경의 내용에 과장이 많다는 것인가요? 그럼 어떻게 믿을 수 있지요?”
“상식적으로 충분히 구별할 수 있습니다. 방금과 같은 경우처럼 같은 땅에 100배의 곡식이 쌓인 것을 상상해 보면 ‘이건 과장된 표현이구나’ 알 수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는 과장된 문학적 표현일까요?”
“과장이 아닌 것 같은데요.”
“그렇죠. 모든 것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이 아니고, 우리가 그분을 믿을 이유가 없죠. 이렇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일점일획이라도 틀림이 없다고 해서 성경에 있는 그대로를 믿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 신앙태도를 ‘문자주의(文字主義, literalism)’라고 합니다. 아주 옛날부터 성경을 그런 식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주로 근본주의자나 극단적 종말론자들이 이런 입장을 가집니다. 잘못하면 성경책을 우상시하는 위험성도 있지요.”
“그럼 ‘일점일획이라도 틀림이 없다’는 말은 어떻게 봐야 하나요?”
“성경은 원래 구약은 히브리어, 신약은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원본이 없어요. 내용을 확정할 수 있는 수많은 사본으로 현재의 성경이 만들어졌고 각 나라의 언어들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여러 한글 번역이 있지요. 일점일획이 다른데 무엇이 진짜 하나님의 말씀일까요? 그래도 우리나라는 거의 ‘개역개정판’이라는 성경을 공통적으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미국의 경우 많은 교회가 똑같은 성경을 쓰지 않고 다양한 번역의 성경을 사용합니다. 그러면 이미 예수님의 말씀이 틀린 게 되어버리는 모순에 빠지는 걸요.”
“에…”
“그 말을 성경을 기록한 문자에 적용하면 ‘문자주의’가 됩니다. 성경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구원계획,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 승천, 그리고 재림, 교회, 종말 등 이런 것이 석기 시대에서 사람이 달나라에 가는 시대에 되어도 변함이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무리가 없습니다.”
“그렇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