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교통을 이용해 꼬박 1시간 넘게 낮은울타리까지 찾아온 60대 자매가 이미 땅거미가 지는 오후 5시에 낮은울타리에 들어섰다.
“차로 태워줄 때는 몰랐는데 지하철 역에서 걸어올라하니 엄청 머네요.”
“많이 힘드셨죠? 여기가 지하철 역에서 많이 멀고 지대가 높아서 값이 좀 쌉니다.”
“그런 게 좀 있겠네요.”
“음료로 뭘 드릴까요? 시원한 걸 드릴까요, 따뜻한 걸 드릴까요?”
“몸이 좀 그래서 따순 걸로 마시야 되겠어요.”
난 ‘따순’이란 말에 버튼이 하나 눌러지는 것 같았다.
냉장고에서 유자청을 꺼내 정수기 온수를 타서 드렸다.
음료와 간식을 들고 공부방으로 들어갔다.
지난 번에 내가 유자청을 너무 진하게 타서 나중에 물을 더 넣어 달라고 하셨기에 이번엔 입에 맞는지 물었다.
“입에 맞으세요?”
“예, 뜨사가 먹으니 온몸이 뜨뜻해지고 좋네요.”
‘뜨사가’에 두 번째 버튼이 눌러져 약간 웃는 표정을 지은 걸 동생이 봤다.
“언니, ‘뜨사가’가 머꼬? 목사님이 몬알아들으시잖아.”
“‘뜨사가’가 와?”
그러면서 언니는 날봤다.
난 마지막 버튼이 눌러졌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렇게 셋이 한바탕 웃었다.
문득 예전 교회에서의 일화가 생각나서 말했다.
“수도권에 있던 교회에서 모임을 하는데 누가 병 음료를 준비해 오셨어요. 그중 경상도 분이 ‘따꿍을 열어 줘야지. 나는 손에 힘이 없어’라고 했는데, 놀라운 건 아무도 알아 듣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아니, 상황이 있고 맥락이 있는데 왜 그걸 아무도 알아 듣지 못하죠? ‘따꿍 깨라라’라고 한 것도 아니고 ‘따꿍을 열어라’라고 했으면 알아 들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따꿍’, ‘뚜껑’ 비슷하잖아요.”
60대 자매는 나의 ‘따꿍 깨라라’에 빵 터져서 박장대소를 했다.
그러며 최근 자신들 조카의 실수담을 들려줬다.
조카는 자동차 회사의 연구원이라고 했다.
프리젠테이션을 하다가 ‘바퀴’라고 해야 하는 것을 ‘발통’이라고 해버렸는데, 다른 사람들이 알아 듣지 못해 분위기가 묘했다는 것이다.
내가 한 수 거들었다.
“아니, 자동차 연구하는 곳에서 엔진, 핸들 이야기하다가 ‘발통’ 나오면 ‘바퀴’라고 대충 알아 들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게 말이예요.”
이렇게 종교와 세대를 넘어 사투리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기독교 공부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