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시즌2] (9)27:30-45

“여기까지는 어머니 리브가와 차남 야곱이 남편이자 아비인 이삭을 속이려는 음모가 이렇게 성공으로 끝날까요?”
“그렇다면 목사님이 묻지를 않았겠죠.”
“ㅎㅎ 맞습니다. 인생이나 신앙이나 단순하고 쉽지 않습니다. 이삭은 속였는데 장남 에서가 사냥에 성공해서 돌아온 겁니다. 에서는 무슨 기대를 하고 있을까요?”
“축복을 받고 싶겠죠.”
“맞습니다. 마치 세자책봉식 같은 걸 하고 도장을 콱 찍고 싶은 겁니다. 왜냐하면 예전에 배고픈 김에 야곱에게 죽 한 그릇 얻어 먹고 ‘장자권은 너나 가져라’ 했던 것이 영 찜찜했거든요. 아마 에서도 어머니 리브가와 동생 야곱이 한통속인 걸 알았으니 그들의 방해없이 진행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가 직접 만들었는지 따로 종에게 시켰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어머니와 동생 모르게 요리를 만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어머니와 동생은 이미 일을 저질렀으니 음식 냄새가 나도 모른 척했겠지요.”
“완전 드라마인데요.”
“그냥 드라마가 아닙니다. 앞으로 더한 일이 벌어집니다. 에서가 아버지 이삭에게 가서 ‘아버지, 사냥해 온 자연산 고기 드시고 맘껏 축복해 주십시오. 저를 족장 후계자로 인정해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삭이 놀라서 ‘넌 누구냐? 난 벌써 맛있는 요리 다 먹고 다 축복해서 남은 것 없다.’라고 대답한 겁니다.”
“질문이 있는데요. 축복을 하면 없어지나요? 다 하면 축복할 게 없어지나요? 그냥 말로 ‘복 받아라’하는 거 아닌가요? 원하는데 한 번 더 해주면 안되나요? 어차피 복 받을 놈이 받는 것 아닌가요?”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러게 말입니다. 목사도 이 사람에게 축복하고, 저 사람에게 축복하고, 예배 마칠 때마다 두 손 들고 축도도 하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의 축복은 지금의 축복과는 뭔가 다른 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말하고 나면 되돌릴 수 없는 뭔가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에서가 자연산 요리를 해온 것이 한두 번이 아닐텐데 그 때마다 수고한 사람 격려 차원에서라도 듣기 좋게 축복하면 좋았겠지요. 그런데 그러지 않고 아버지 이삭이 하루 딱 작정하고 그렇게 한 걸로 봐서 지금의 축복과는 뭔가 달랐다고 받아들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뒤통수를 맞은 아버지 이삭과 장남 에서가 마주 앉아 차남인 야곱을 욕하기 시작합니다. ‘네 아우가 나를 속였다, 야곱이 너의 복을 빼앗았다.’, ‘야곱이 전에는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지금은 복을 빼앗았습니다.’ 정말 이상한 장면이죠?”
“드라마도 좀 이상한 드라마 같아요.”
“지금부터 3500년 전의 팔레스타인 지역의 문화를 우리가 다 이해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겠죠. 게다가 그런 역사와 배경을 바탕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이니까요. 성경을 읽을 때 일단 내용 그대로 받는 게 필요합니다. 그러다 보면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형 에서가 아버지 이삭에게 묻습니다. ‘저를 위해 남은 복은 없습니까?’ ‘남은 복’이란 말도 우리에게 개념도 없는 이상한 표현이죠?”
“예, ‘남은 복’은 뭐죠?”
“족장인 아버지가 동생에게 복을 다 줬다고 하니까 그랬겠죠.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잔인한 수준입니다. ‘너를 위해 남은 복이 없다. 너는 아우를 섬길 것이다.’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할까요?”
“일단 위로해야죠. 그리고 ‘동생은 동생의 복이 있고, 너는 너의 복이 있다.’라고 얘기해 줄 것 같아요.”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쌍둥이인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이 이미 이삭과 리브가에게 동생을 택하셨다고 밝히신 걸 기억하세요?”
“예.”
“창세기에 나오는 족장들은 한편으로는 처음 하나님을 믿으며 세상을 살아가는 고민있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역할도 했습니다. 지금 이삭은 유목민 족장으로서 자식에게 속임을 당한 아버지의 속을 가감없이 토로하기도 하지만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선언하고도 있는 겁니다.”
“복잡하네요. 어떻게 구별할 수 있죠?”
“사실은 명확하게 경계를 짓고 여기부터는 아버지이고 여기부터는 선지자라고 구별할 수 없습니다. 다만 족장으로서의 마음과 아비로서의 마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으로서는 할 수 없는 말이 보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성경을 계속 읽어왔기 때문에 그 차이가 보이지만 처음인 여러분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시는 게 당연합니다.”

“자신에게 남은 복이 없는 걸 확인한 에서는 동생 야곱을 죽이기로 작정합니다.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멀고 거동이 불편한지 오래 되었기 때문에 에서는 아버지가 죽으면 야곱을 죽일 것이라 합니다. 지금도 유산을 놓고 형제자매지간에 소송을 하고 남보다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지요. 옛날은 재산 정도가 아니라 작은 왕국의 왕같은 지위를 물려받는 것이기 때문에 더 심각했습니다. 그러니 장남인 에서의 입장에서는 치사하게 거짓말로 아버지를 속여 자기의 복을 도둑질 당했다는 생각에 동생을 죽여서라도 자기의 권리를 되찾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무서운 계획을 어머니 리브가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에게 일단 자기 친정인 외갓집으로 피신하라고 명합니다. 에서의 분노가 풀리면 사람을 보내 불러오겠다고 귀환대책도 세워줍니다. 리브가가 마지막에 묘한 말을 합니다.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 이번 사건을 꾸밀 때부터 리브가는 이미 에서를 잃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짓을 해서라도 복을 받게 하려고 했던 둘째 야곱이 성난 에서의 손에 죽어버리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죠? 저는 성경이라면 교훈이 되는 좋은 이야기만 있는 줄 알았거든요. 이건 그냥 드라마가 아니라 막장 드라마네요.”
“이것이 인생이니까요. 성경은 도덕책이 아니라 입에 담기에도 민망한 우리의 신랄한 모습을 드러내고, 또한 그런 인간을 알면서도 사랑하고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록한 책입니다.”
“목사님의 설명을 들으며 성경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