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overy or reset

코로나 사태로 사회는 물론 교회도 큰 변화를 맞았다.
예배는 예배당에 모여야 예배이지 가정에서 모이는 건 예배도 아니고 교회도 될 수 없다는 가르침이 무색하게 됐다.
처음에는 ‘영상 예배’, ‘온라인 예배’, ‘비대면 예배’ 등에 대한에 대한 신학적 논의는 물론이고 명칭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었으나, 처음 문제제기를 했던 사람들이나 교회도 영상 장비를 사고 담당 인력을 배치하면서 1년 새 아무도 토를 달지 않게 됐다.
그동안 온라인 예배를 임시호흡기처럼 여기고 여차하면 떼낼 것처럼 여겼던 목사든 성도든 그 사람들도 이제는 온라인이란 방법론에 잘 적응한 것 같다.
상황이 적응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으로 몰아갔으니.
그러면 그 때 제기했던 신학적 문제제기는 용도폐기 된 것인가?

아니다.
진짜 교회가 무엇이며, 진짜 예배가 무엇인지, 진짜 봉사가 무엇인지, 진짜 성도의 교제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아니, 성도는 이런 본질적인 고민하고 있는데 목사는 다른 고민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언제 코로나가 끝나서 다시 예전처럼 예배당에 북적북적 모여 진짜 예배를 하고, 진짜 봉사를 하고, 진짜 성도의 교제를 하고, 나는 흐뭇하고 뿌듯하게 그것을 지켜볼 것인가?’라는.
해왔던 것이 진짜였는지 고민도 없이 다만 그 때가 좋았기에 그 때로 돌아가기 원하는 ‘회복(recovery)’.

진짜 회복은 무엇일까, 진짜 회복되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질문했다.
“우리 사마리아 사람들은 세겜에서 예배해야 된다고 아는데, 유대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합니다. 무엇이 옳습니까?”
장소에 대한 질문에 예수님은 다르게 대답하셨다.
“이곳도 아니고 저곳도 아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할 것이다”
이미 예수님께서 정리해 주신 내용이다.

예배당에 모이지 못해서 흔들리는 예배의 질이었다면 원래 참다운 예배를 행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목사는 성도에게 어떤 예배를 드리도록 이끌었으며, 성도는 어떤 예배자로 참여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솔직히 목사는 성도를 어쩌다 콘서트에 참여하는 관객 정도 수준이면 천국에 들어가는 걸 기대할 수 있도록 만들었고, 성도는 스스로 교회의 브랜드를 향유하고 평가하는 소비자 수준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목사와 성도가 연합하여 예배에 가장 중요한 요소라며 가장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목사의 설교가 성경에 근거했는지, 본문 맥락에는 맞는지 생각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참여하고 따르는 사람을 ‘믿음 좋은 성도’처럼 인식하게 만들었다.

성도의 봉사는 대부분 교회당 안에서 이루어진다.
주차안내, 새신자 등록안내, 성가대, 주일학교 교사, 소그룹 팀장, 주방, 청소 등.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부름받은 성도가 교회당 내의 봉사에 지쳐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아갈 에너지를 상실했다.
봉사를 하기 위해 출근하듯 교회당에 가야 하니 “나는 교회당과 집밖에 모른다”는 실상 부끄러운 고백을 자랑스럽게 한다.
교회당 안에는 짠 맛으로 넘쳐나고, 찬란한 빛으로 눈부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짠 맛과 빛이 세상에서는 맥을 추지 못한다.

성도의 교제라고 하지만 그 교회의 멤버가 모였을 뿐 하는 이야기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하는 말과 똑같다.
부동산, 주식 등 재테크, 학교, 학원 등 자녀교육, 여행, 취미.
성도의 교제라는 간판을 붙이기 위해 잠시 성경책이나 성경공부 교재를 펴지만, 그 책을 덮는 순간 성도의 존재감은 그림자까지 사라진다.

초대 교회 성도는 신분사회 속에서도, 핍박 속에서도 자유인과 노예가 함께 모였다.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모임이었고, 특히 겸상은 신분사회의 근본을 흔드는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은혜를 입었다고 확신하는 자들은 자발적으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해서 휴일을 배려하지도 않고, 그 모임을 용납하지도 않는 그 시대에 일과를 다 마친 늦은 시간에, 피곤함에 지쳐 쉬고 싶은 그 시간에 한 자리에 모였다.
일상에서는 나만 그 믿음을 가지고 고군분투하는 것 같아 외롭고 힘들어 흔들릴 때도 있지만, 그곳에 가면 나와 같은 믿음으로 자기의 현장에서 역시 자기와의 외롭고 힘든 싸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보며 위로 받고 힘을 얻는다.
그리고 자신도 역시 다른 사람의 힘과 위로가 되니 만나기만 해도 좋다.

일주일 동안 자신의 삶 속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배려에 대한 감사의 고백을 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찬양한다.
참석한 다른 사람들도 십분 공감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을 듣고, 제정하신 성찬을 먹는다.
영혼과 육신이 동시에 만족함을 얻는다.
합심하여 드리는 기도는 잘 살게 해달라는 일방적인 기원을 하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이 공동체의 주인이심과 예수님이 정해주신 방향과 성령님이 함께하심을 확인하는 충전의 시간이다.
그들은 만면희색으로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 빛과 소금으로 살아낸다.
요즘 식의 봉사는 자리를 제공한 집 주인만 하면 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로마서 12:1)
성도가 제물이 될 제단이 과연 어디일까?
나는 교회당이 아니라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성도는 ‘세상의 소금과 빛(마태복음 5:13,14)’으로 부름 받았다.
소금이 녹아야 할 자리, 빛이 비춰야 할 곳은 교회당 안이 아니라 세상이다.
성도는 당연히 더이상 교회당 안의 성도가 아닌 세상 속의 성도로 발견되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코로나 사태 이전으로의 ‘회복 또는 회귀(recovery)’가 아니다.
지금 해야 하는 것은 ‘재설정(reset)’이다.
하나님이 한국 교회가 재설정을 할 수 있도록 주신 절호의 기회, 은혜의 기회이다.
각자가 recovery를 할 것인지, reset을 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