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8 낮은울타리예배

손님이 네 명이나 찾아오고, 내 생일이라는 이벤트가 있었던 지난 주의 분위기는 잊고 원래 낮은울타리 자체의 분위기로 돌아왔다.
예배가 시작할 땐 부슬비가 내리다가 예배 중엔 폭우라고 할 정도로 세찬 비가 내렸다가 다시 개는 정도로 바깥은 변화무쌍했지만 작은 아파트에서 소수가 드리는 낮은울타리 예배는 평온했다.
신앙은 이벤트가 아닌 일상의 삶이니까 당연하다.

‘성도의 감사와 찬양’ 시간에 평소 이야기를 잘하지 않는 청년이 자기가 만들어온 필름통 열쇠고리가 바자회 물품으로 기증된 것이 감사하다고 했다.
두 주 전 청년이 필름통 열쇠고리를 가져왔을 때, 너무 예뻐서 내가 한번 대학가나 해운대에 가서 팔아볼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물만골 쪽방촌 무릎시술비를 위한 바자회가 화명일신기독병원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물품으로 기증을 했다.

설교는 예수님의 부활의 현장을 묘사한 요한복음 20장에 이르렀다.
낮은울타리 초기에 ‘왜 이렇게 예배하나요?’ 시리즈를 10번에 걸쳐 설교한 뒤, 낮은울타리 분위기상 복음서 설교가 필요할 것 같아 복음서 중 가장 늦게 기록된 요한복음을 택하고 설교해서 지금까지 왔다.
어느새 105번째 설교가 되었다.
원래 나는 한 성경으로 이렇게 오래 설교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는데, 낮은울타리 예배 설교를 하면서 이렇게 변했다.

설교 내용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부활의 약속을 받고, 몇 번씩이나 듣고, 빈 무덤까지 봤음에도 부활을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당시 제자들과 주변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부활’이란 것이 얼마나 믿기 힘든 일인지 먼저 점검했다.
그만큼 ‘죽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에게 무섭고 무거운 실체인 것이다.
부활을 믿는다는 기독교인 중에도 부활을 제대로 알고 누리기보다는 죽음이란 실체가 두려워서 그것을 덮기 위해 부활이란 개념을 의지하고 있는 사람도 제법 많을 것이다.

찬송은 부활과는 거리가 먼 ‘아무 것도 두려워 말라’를 택했다.
죽음을 이긴 부활 신앙을 제대로 가진다면 우리에게 닥친 고난의 일들을 힘겹게 견뎌내긴 하지만 적어도 두려워하지는 않아야 되겠다는 마음에서이다.
신앙의 개념들을 정리하면 적어도 삶에 대한 태도를 어떻게 해야할지 방향을 잡을 수는 있다.

예배 후 식사하며 추석 연휴를 어떻게 보낼지 대화를 나눴다.
낮은울타리 식구들이 비신자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야할 상황이어서 추석 연휴 중 낮은울타리 예배는 쉬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