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지어진 인간을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두셨습니다. 에덴동산의 크기가 얼마나 될까요?”
‘에덴동산’은 들어봤는데 그 에덴동산의 크기가 어느 정도였을지는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얼굴들이었다.
“글쎄요”
“남의 집이라 별로 관심이 없으시군요”
“ㅎㅎ 그런가 보네요”
“에버랜드 정도 될까요?”
다들 청년 때 갔든 자녀들을 데리고 갔든 에버랜드를 가 본 것 같다.
에버랜드라고 하니 대충 크기가 와닿는 모양이다.
“에버랜드에 가면 구석구석 돌아다니기가 피곤할 정도로 넓습니다. 에덴동산이 그 정도 될까요? 아닙니다. 에덴동산은 큰 나라 만큼이나 넓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짐승들이 다 모이긴 했지만 우리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태를 불편함없이 해야 하니까요. 그러니 엄청 넓었겠죠”
다들 ‘그래야 하겠구나’라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님은 창조한 인간을 에덴동산에 두시고는 그들에게 관리하도록 하셨습니다. 짐승들 이름도 짓게 하셨고요. 다들 ‘노동’을 힘들어하고 ‘노동’을 천하게 여기고 ‘노동’을 하지 않으려 합니다. 하지만 ‘노동’은 인간이 타락한 형벌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일하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은 일하시는 분이니 나도 일한다’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잘못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이 놀고 먹는 걸 좋아하고, 또 건물주가 되어 그렇게 살고 싶어하는 아이들도 많지만 정작 그렇게 살면 인간본성이 상하는 것입니다. 길어야 한두 해 놀고 먹으면 아마 견딜 수 없을 겁니다. 인간은 일하면서 보람도 느끼고 자기계발도 되는 것을 본성적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마치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 가자마자 가운데로 달려가서 선악과를 따먹은 것처럼 사건 전개가 빠릅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일거리가 귀찮아 짐승들의 이름을 마구 지은 것이 아니라 생태를 하나하나 관찰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각각 이름을 지었을테니까요. 그래야 자신도 보람이 있으니까요. 얼마나 긴 세월을 보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에덴동산에 들어가자마자 타락한 비극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루의 일을 마치고 하나님과 대화하기도 하고, 일주일의 일을 마치고 하나님과 안식하는 시간을 가졌을 것입니다. 상상만 해도 설레고 부러운 일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을 닮아 아주 독특한 존재양식으로, 또 일하도록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내용인 것을 다들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건 중심이다.
핵심은 하나님이 사람을 어떤 존재로 지으셨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으신 분이 사람이 어떻게 의미를 부여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가장 잘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을 통해 비춰보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 말이지요. 내가 나를 잘 모릅니다. 내가 기준이 될 수 없고 나 자신을 잘 모르는데 남을 어떻게 잘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통해 나 자신을 보고, 남을 보고, 일을 보고 관계를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보면 일단 나 자신이 하나님 모양을 닮은 귀한 존재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그런 시각으로 보게 됩니다. 심지어 나와 잘 맞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말이지요. ‘저 사람도 하나님의 모양으로 창조된 귀한 존재이다’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지요. 진정한 인간존중이지요. 그래서 예수님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받은 자신을 존중하고 역시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받은 다른 사람도 존중하며 삽시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오늘 처음 모임에 참석하신 분에게 질문했다.
“어떠셨어요?”
“교회에 다니면서 실은 잘 모르는 부분이 많았지만 이게 물어도 되는 내용인지, 물으면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지 몰라서 곤란했는데, 오늘 이렇게 들으니까 좋네요. 계속 모임에 나오고 싶습니다”
“도움이 되셨다니 좋습니다. 그렇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