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신자 여성들과 성경공부 – 아브라함의 첩과 서자(3)

“하갈이 임신부의 몸으로 사막에서 이집트와 가나안의 경계 지역에 이르렀을 때, 거기서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천사가 하갈을 만나러 온 겁니다. 이게 성경의 놀라운 부분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은 자신들만 위하고, 성경은 자신들을 위해, 자신들 중심으로 쓰여진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아니잖아요. 사라도 천사를 만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곤경에 빠진 이방 여인 하갈을 만나기 위해 그곳에 나타난 겁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모든 민족을 위해 쓰여졌으며,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을 향해 있음을 확인시켜 줍니다”

“천사가 먼저 하갈에게 말을 거는데요, 천사는 지금 하갈이 어떤 형편이며 어디로 가는지 알까요, 모를까요?”
“알겠죠”
“그런데 천사가 뭐라고 물었는지 창세기 16장 8절을 보세요”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호칭에서 도망친 여종임이 드러납니다. 다 아는 거죠. 처음 보는 사람이 자기에 대해 정확히 말하니 하갈도 움찔했을 것입니다. 천사는 하갈이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다 알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도 이렇게 대화를 시작하십니다. 환자가 병을 고치고 싶어서 예수님께 나왔는데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환자가 불편한 몸을 이끌고 거기까지 왔으면 낫고자 하는 거지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굳이 짓궂게 여겨지는 듯한 질문을 하시는 겁니다. ‘네가 환자인 걸 인정하느냐? 나를 신으로 믿느냐? 나를 진정으로 신뢰할 수 있느냐?’라는 의미지요. 자신을 직면하게 하고, 하나님을 직면하게 하는 질문입니다”

“하갈이 솔직하게 대답합니다. 자신은 여주인에게서 도망한 사람이라고. 이건 단순히 솔직한 대답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건 대단한 고백입니다. 정말 천사 앞에 모든 걸 내놓은 거죠. 당시에 도망친 노예는 죽여도 상관이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또 의외의 일이 벌어집니다. 곤경에 빠져 목숨을 걸고 대답하는 하갈을 향해 천사는 매정한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학대를 견딜 수 없어 임신부의 몸으로 도망한 건데 다시 돌아가라니요. 게다가 ‘내가 여주인을 변화시켜서 괴롭히지 않게 해줄게’가 아니라 ‘너는 여주인에게 복종하라’니요”
“좀 그러네요”
“이 구절을 옛날 귀족이나 현재 기업주 등 기득권자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압제를 정당화시킬 수 있는 구절이 됩니다. ‘봐라, 하나님도 자신을 학대한 주인에게 다시 돌아가 복종하라고 했다’라면서 말이죠. 반대로 옛날 노예나 현재 노동자 등의 입장에서 보면 성경은 기득권자들을 옹호하는 종교가 되는 거죠. 성경은 선입견이나 다른 의도를 가지고 보면 아전인수격 해석이 나오게 됩니다. 정말 위험한 책이 되는 거죠. 자신의 입장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일까를 고민하며 봐야 하는 책입니다”

“여기서 질문 하나 할까요? 하나님은 노예제를 찬성하실까요, 반대하실까요?”
“반대하시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노예제도를 철폐하라는 말씀이 없어요. 오히려 오늘 우리가 본 이런 구절은 노예제를 옹호하는 것 같이 보이지 않나요?”
“그러네요”
“지금은 노예제도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자유로운가요?”
“아니요, 여전히 속박되어 있죠”
“예, 그러면 알 수 있죠. 인간의 제도가 답이 아니라는 걸. 노예제가 철폐되었지만 ‘계약’이라는 아주 자유로운 인간의 행동을 통해 실상은 여전히 상급자나 기득권자에 구속된 모습이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독특한 방식을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 생각에는 100명의 사람에게 똑같이 100만원씩 주면 평등할 것 같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누구에게는 1000만원을 주고 누구에게는 10만원을 주시는 거예요. 그리고 뭔가를 기대하시는 거죠. 그게 뭐냐면 1000만원 가진 자가 ‘내가 가진 게 생활에 필요한 것 이상으로 너무 많구나. 주변에 어려운 사람이 없나?’하고 돌아보고 찾는 겁니다. 그리고 10만원 가진 자를 발견하고 자기 것을 나누고 도와주는 겁니다. 그럼 무슨 일이 생기느냐? ‘관계’가 만들어 집니다. 받은 사람은 가진 자가 자기를 돌아봐 줘서 너무 감사하고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고, 준 사람은 주는 것도 기쁜 일인데 고맙게 받아 주니 감사하고, 무슨 일 있으면 한 번 더 돌아보게 되고. 받은 사람은 ‘하나님, 저 고마운 사람이 하는 일 잘되게 도와 주세요’ 기도하고, 준 사람은 ‘하나님, 저 가난한 사람이 용기를 잃지 않고 살아가게 도와 주세요’ 기도하는 거죠. 자기가 벌어 자기만 먹는 사회에는 관계가 생기지 않습니다. 인간이 이상적으로 고안한 공산주의 사회의 맹점이죠. 하나님은 사회와 인간의 설계자이시니 ‘관계’가 최고의 사회안전망이란 걸 인간이 깨닫길 바라시는 거죠”
“듣고 보니 정말 그러네요”

“신약 성경에 주인의 재물을 훔쳐 도망친 노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복음을 듣고 자신의 실상을 고백했어요. 복음을 전한 사람이 그 노예를 위해 역시 예수님을 믿는 주인에게 편지를 써줍니다. ‘형제처럼 대해주라’고. 노예는 그 편지를 갖고 돌아옵니다. 주인은 노예를 죽여야 마땅하지만 그를 예수님의 사랑으로 대해줍니다. 신분은 여전히 노예이지만 학대하지 않는 거죠. 그러면 노예가 어떻게 처신할까요? 자신을 죽여야 할 주인이 인격적으로 대우해 주니 성심껏 섬기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주인도 그의 진심을 보고 마음이 풀려 더 잘 대해주는 거죠. 성경에 의하면 사회의 특정 제도 자체가 답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심오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도가 무익한 것은 아닙니다.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더 좋은 사회를 위해 이상적이지는 않더라도 최소한의 제도를 만들고 보완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게 자신들의 일이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