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신자 여성들과 성경공부 – 아브라함과 아비멜렉(3)

“사라가 회춘하여 사라가 얼마든지 건강한 아이를 출산할 수 있는 건강한 몸이 된 것은 좋은데, 아비멜렉이 동침하면 안될 일이죠. 보통 왕이 여인을 궁으로 데려가면 바로 동침하는 것이 아니라 여인을 준비시키는 기간이 있습니다. 사라를 데려간 첫날이니 사라는 아직 준비기간 중인데 바로 그날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을 건드리면 죽는다’고 하신 거죠. 사라가 회춘해서 임신을 했는데 그 아이의 아버지가 아브라함인지 아비멜렉인지 알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지면 큰일이니까요. 아비멜렉도 꿈 속에서 변명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누이라고 해서 그런 거지 남편인 줄 전혀 몰랐고, 아직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네가 모르고 한 것을 나도 안다. 그래서 미리 막으려고 하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다행이죠. 그 다음 하나님 말씀이 아비멜렉에게는 무시무시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선지자다. 네가 사라를 돌려 보내고 그가 너를 위해 기도하면 네가 살 것이고, 네가 사라를 돌려 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죽을 것이다’라고 하신 겁니다. 성경에 보면 ‘선지자’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는데 여기에 처음 나옵니다. 성경이 인정하는 최초의 선지자는 아브라함입니다. 이제 아비멜렉이 어떻게 할까요?”
“돌려보내겠지요”
“아비멜렉이 잠이나 제대로 잤겠습니까? 창세기 20장 8절에 보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 모든 신하들과 종들을 불러 놓고 꿈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들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당연히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 따졌습니다. ‘나 완전 죽을 뻔했다. 너 무슨 억한 심정으로 이런 짓을 한 것이냐?’라고 물었지요. 아브라함은 ‘이 곳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아내를 빼앗기 위해 나를 죽일까 두려웠다’고 속내를 밝혔습니다. 이 말을 통해 아브라함이 그 지역에서 어떤 입장으로 살고 있는지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지금 몇 살이라고 했지요?”
“100살요”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처음 들어올 때 나이를 기억하세요?”
“75세요”
“그럼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몇 년을 산 것인가요?”
“25년요”
“25년을 살았는데, 아브라함은 여전히 외로운 나그네였던 것입니다. 그곳 사람들이 아브라함도 모르고 아브라함의 아내도 누군지 모르고 관심도 없었다는 거죠. 그러니 그 예쁜 여인이 보이니까 냉큼 왕에게 데려갈 생각을 한 것이겠지요”

“아브라함이 변명을 덧붙입니다. ‘원래 사라는 나의 이복누이였는데 아내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이런 말을 했는데 어떻게 보이세요?”
“좀 찌질해 보여요”
“그래도 족장이고, 가장이고, 남편인데 그것이 사실이지만 구차한 변명으로 일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게 바로 아브라함이란 사람의 실체입니다. 한번에 사람을 감화시키는 탁월함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목숨의 위협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보통 사람인 거예요. 그래도 참 귀한 것은 그 연약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나안 땅에서 그 불편을 겪으면서 나그네로서 계속 살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걸 그 사람의 의로움으로 여기셨지요”

“이전 이집트에서 파라오가 그랬던 것처럼 아비멜렉이 양과 소와 돈과 종들을 아브라함에게 주고, 사라를 깨끗한 몸으로 안전하게 돌려 보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그랄 땅에서 마음에 드는 곳을 골라 살도록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의 배려를 받으며 그랄 땅에 계속 머물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이 사라를 데려온 그 일로 아비멜렉 왕가의 임신과 출산이 멈췄던 모양입니다. 왕가에는 후손이 중요한데 난감하게 된 것이죠. 어려운 일이 생기자 아비멜렉은 하나님이 선지자라고 한 아브라함에게 왕가를 위해서 기도를 부탁한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위하여 기도하자 아비멜렉의 아내와 후궁들이 임신하고 출산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럼 아비멜렉이나 그랄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그런 일이 벌어졌으니 영험한 사람으로 생각하겠네요”
“그렇죠. 사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봉변을 당한 것이고 얼굴 들고 살기에 민망한 일을 당한 것이지만 하나님이 그 일이 사람들에게 계속 기억되지 않고, 신과 통하는 귀한 사람으로 또한 잘못 건드리면 안되는 사람으로 기억되도록 바꿔 주신 것입니다”
“전화위복이네요”
“맞습니다. 창세기 20장은 위기도 있었지만 사라의 회춘과 아브라함의 얼굴이 세워진 겹경사가 기록된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