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신자 그룹3]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게 뭡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게 뭡니까?”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것 아시죠?”
“예.”
“아담과 하와가 그 전에는 선과 악도 모른 채 바보처럼 지내다가 그 열매를 먹고 나서 선과 악을 분별할 줄 알게 되었을까요?”
“글쎄요.”
“선과 악을 분별할 줄 알게 되었다면 그게 더 좋은 것 아닌가요?”
“그러게요.”
“이건 그때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해주신 선과 악을 따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선과 악을 결정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아~~”
“예를 들어 하나님이 ‘양을 난도질해서 죽이면 악이다’라고 했다면 아담이 했을까요?”
“아니요.”
“왜요?”
“끔찍하니까요.”
“맞습니다. 그래서 그냥 다른 나무에는 얼마든지 하도록 허용된 열매를 따먹는 행위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만 하지 말라고 ‘악’의 범위를 정한 것입니다. 그래야 진짜 하나님의 선과 악의 기준을 따르는지 제대로 판단할 수 있으니까요. 처음에는 하나님의 선과 악을 따랐지요. 그런데 뱀의 유혹을 듣고 하나님의 선과 악의 기준을 어기고 열매를 따먹는 행위를 악으로 여기지 않고 과감히 행한 것입니다. 열매를 따먹는 행위가 악한가요?”
“아니요. 그걸 선하거나 악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맞습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기에 열매를 따먹는 행위를 선하다거나 악하다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냥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허용되는 행위인 거죠. 그러나 다른 사람 소유의 나무라면 어떨까요?”
“그럼 죄가 되겠지요.”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과 악을 정하는 주체가 하나님 한 분이었는데 사람이 감히 ‘나도 선과 악의 기준을 정하는 존재가 되겠다.’고 한 겁니다.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한 거죠.”
“그런 의미가 있군요.”

“그런데 이게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혹시 운전하세요?”
“예.”
“그럼 고속도로에서 달리는 차들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고속도로에 수많은 차들이 달리고 있습니다. 그 차들은 각각 다양한 속도로 달립니다. 그런데 희한한 건 운전자들 모두가 자기 스스로 속도의 기준이 되는 겁니다. 자기 차를 휙 앞서가는 차를 보면 사람들이 보통 뭐라고 합니까?”
“솔직하게 말해도 되나요?”
“예, 그럼요.”
“미친 놈이라고 하죠.”
“맞습니다. 그럼 나보다 천천히 가면서 흐름을 방해하는 것처럼 보이는 차는요?”
“바보같은 놈이라고 하죠.”
“예, 모두가 기준이 되어 나만 옳고, 나보다 빨리 가면 모두 미친 놈, 나보다 느리게 가면 모두 바보라고 판단합니다. 제가 극단적인 예를 들었습니다만 사람들이 모두 이런 식으로 자기가 선과 악의 기준을 만들고 판단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러네요.”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건 자기가 선과 악의 기준을 만들고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이 정하신 기준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겁니다.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처럼 선과 악을 정하고 판단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연습이 필요합니다. 연습을 했다고 쉬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 속에 있는, 자신이 하나님처럼 선과 악의 기준을 정하고 판단하는 속성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평생 내면의 싸움을 해야 합니다. 이건 평생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은 겪지 않는 일이지요. 기독교인이 되면 성가시고 불편한 부분이 있다는 게 이런 겁니다. 자기 마음대로, 편한대로 하지 못하니까요. 그런데 이런 내면의 싸움이 생겼다는 것 자체가 그 사람 속에 믿음이 생겼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래서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