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시즌2] (36) 39:1-5

“오늘부터 다른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전에 형들이 심한 질투로 노예상인들에게 팔아버려서 이집트로 갔던 동생 이야기 기억하세요?”
“그럼요. 애니메이션 ‘이집트왕자2’ 이야기잖아요. 애들 보여주면서 같이 봤지요.”
“그 동생의 이름도 기억하세요?”
“요셉이요.”
“잘 기억하시네요. 요셉이 노예상인에게 팔려서 이집트까지 끌려갔는데 그곳에서 요셉을 노예로 산 사람은 파라오의 친위대장이었습니다. 친위대장은 요즘 말로 하면 경호실장입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보디발’이었습니다. 여기서 노예에 대해서 알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노예는 24시간 힘든 일을 하는 근로자가 아닙니다. 말할 줄 아는 물건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편애를 받던 요셉으로서는 매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나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을 마치 가축처럼 억지로 해야 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을 겁니다. 몸만 힘든 것이 아니었지요. 사실 사람은 몸만 힘든 것은 제법 견딜 수 있습니다. 10대 후반의 요셉은 형들에게 배신당했다는 미움과 아버지는 자신이 어디 있는 줄도 모르니까 구하러 올 가능성도 없다는 절망으로 더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은 요셉과 같은 처지에 빠지면 어떠시겠어요?”
“너무 끔찍한데요. 상상도 하기 싫습니다.”
“죽고 싶을 것 같네요.”
“저는 성경을 가르치는 입장이니까 내용을 잘 전달하기 위해 상상을 해봅니다. 그러면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겁니다. 성경을 덮고 심호흡을 해야할 정도입니다. 제3자이고, 글로만 읽어도 이런데 당사자는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요셉의 형편에 대한 성경의 시각입니다. 2절과 3절을 같이 읽어주시겠어요?”

창세기 39:2,3 
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제가 여러분에게 성경 구절을 읽도록 하는 건 깊은 뜻이 있습니다.”
“이 구절이 중요한가요?”
“아니요, 여러분이 성경을 읽어주셔야 제가 그동안 과자도 먹고 커피도 마십니다.”
“예? 무슨 중요한 의미가 있는 줄 알았네요 ㅎㅎ”
“그런데 읽으면서 좀 이상한 것 못 느끼셨나요? ‘형통’이란 단어 들어보셨죠?”
“예, 보통 ‘만사형통’이라고 하지 않나요?”
“그렇죠, 요즘은 잘 사용하지 않지만 예전엔 신년카드 문구로 인쇄되어 있기도 했죠.”
“신년카드라는 말을 진짜 오랜만에 듣네요, 예전에는 많이 봤는데 요즘은 새해 인사도 카톡으로 다 하니까 거의 안쓰는 것 같아요.”
“만사형통이 무슨 뜻이죠?”
“모든 것이 다 잘된다는 뜻 아닌가요?”
“지금 요셉의 형편을 보고 만사형통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전혀요.”
“그런데 성경은 왜 요셉에게 ‘형통’하다고 했을까요?”
“모르겠는데요.”
“사람은 보통 언제 ‘형통’하다고 생각할까요?”
“건강하고, 하는 일이 잘되고, 돈도 많고, 행복할 때?”
“맞습니다. 지금 요셉은 오히려 불행하고 불쌍한데 성경은 형통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독특한 시각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일반적으로 ‘형통’한 것과는 다른 ‘형통’의 기준이 있다는 겁니다. 성경 구절을 보고 그 기준을 한번 찾아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맞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가 2절에도 나오고 3절에도 나옵니다. 요셉은 지금 세상적 기준으로는 오히려 폭망한 케이스인데 성경은 ‘형통’하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성공하고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걸 ‘형통’이라고 보는 겁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성공하고 부자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나요? 기독교는 성공하고 부자가 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건가요?”
“아니요, 저도 성공하고 부자가 되면 좋겠습니다.”
“예? ㅎㅎㅎ 목사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줄 몰랐어요. 그럼 목사님 하시면 안되는 것 아닌가요?”
“목사도 사람인데, 사람이라면 모두 성공하고 부자가 되길 바라죠. 그런데 기독교는 성공하고 부자되는 것을 ‘형통’의 절대적 기준이라고 보지 않는다는 겁니다. 기독교인 중에는 부자도 있지만 가난한 사람도 있습니다. 일반적인 기준으로 보면 부자는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형통한 것이고,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데도 복을 받지 못해서 형통하지 못하다는 말이 되죠. 하지만 하나님은 부자나 가난한 자를 똑같이 사랑하십니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것이 기독교의 아주 중요한 가치이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형편이 어떻든지 똑같이 형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신다’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요셉처럼 아주 힘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의 고통에 시달리는 그들이 이 말씀을 보면서 기독교의 가치로 되돌아올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인 중에도 욕심 많고 돈만 밝히는 사람도 있던데요.”
“맞습니다. 참 안타깝죠. 그런데 그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기는 하지만 기독교의 가치를 가졌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진짜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성경의 가치를 따른다고 하면 돈만 밝힐 수가 없거든요. 그 사람들은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착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기독교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만든 기복종교를 믿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럼 그 사람들은 잘못 믿고 있는 거네요?”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자기 잘못을 깨닫고 바른 신앙을 갖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필요한 것이고, 다른 사람을 향해 섣부른 판단을 하면 안되는 것이죠.”

“이 구절에서 우리가 또 주의깊게 보아야 할 것은 주인이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하시는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 주인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을까요?”
“아니요. 이집트의 신을 섬기는 사람이겠죠.”
“맞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보기에 자기가 믿는 신이 아닌 다른 신이 요셉과 함께하는 것을 보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요셉 옆에 있는 것을 보았다는 것일까요?”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럼 주인은 무엇을 본 것일까요?”
“요셉이 일을 잘했다는 것 아닐까요?”
“맞습니다. 요셉이 일을 성실하게 하고, 요셉이 하는 일은 거짓이 없고, 뒤탈이 없었다는 뜻일 겁니다. 그러면 주인은 마음이 어떨까요?”
“그런 직원이 있다면 좋을 것 같아요.”
“계속 일을 믿고 맡길 것 같아요.”
“그렇겠죠. 요셉에게 맡기면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잡음이 없는 걸 보고 주인은 ‘요셉이 섬기는 신이 요셉을 도와주고 있는가 보다’ 생각하게 되었을 겁니다. 요셉이 일을 맡으면 일이 잘 돌아가니 또 일을 맡기고, 점점 더 중요한 일을 맡겼습니다. 결국 자기 재산을 다 맡겼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요셉이 집안 총무의 일을 맡게된 때부터 주인의 집이 평안하고 재산이 불어나는 겁니다.”
“그런 직원이 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그런 직원이 있으면 스카웃을 해서라도 불러와야죠.”
“주인이 많은 노예들을 겪어봤을텐데 주인이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자기 집안이 달라졌다는 걸 느꼈다는 거죠. 성경의 ‘형통’은 이런 것입니다. 자기 혼자 잘 되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 덕분에 주변 사람들도 함께 잘 되는 겁니다. 예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세기 12:3) 혹시 기억나세요?”
“그걸 어떻게 기억합니까?”
“ㅎㅎ 정상이십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그런 삶을 원하셨다는 겁니다. 요셉의 주인은 자기가 요셉 덕분에 잘 되니까 주인도 요셉에게 잘 대해줬을 겁니다. 그럼 요셉도 좋은 거죠. 물론 요셉은 노예로서 외롭고 힘든 것은 여전했을 겁니다. 하지만 인생에 모든 조건이 다 잘 되고 마음에 거리낀 것이 없이 행복한 삶이 어디있습니까? 아무리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인생은 여전히 감내하고 살아야 하는 부분이 있지요. 여기서 우리가 봐야하는 건 ‘성경이 말하는 형통이란 어떤 것인가?’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믿는 사람들만 챙긴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네요.”
“그래서 목사가 잘 가르쳐야 하고, 기독교인들도 잘 살아야죠.”
“꼭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인생을 살아가는데 참 중요한 개념을 배운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