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켄 가이어의 ‘묵상하는 삶’이 성경을 관찰, 적용, 해석해서 묵상하는 법을 말했다면 나는 이 책을 외면했을 것이다.
이 책이 인상적인 건 기억에 남은 한 대목 때문이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다.
시장에 어느 노인이 농산물을 팔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다가가서 묻는다.
“하나에 얼마입니까?”
“10센트요”
“전부 다는 얼마입니까?”
“전부는 팔지 않소”
“왜요? 팔러 나온 것 아닙니까?”
“팔러 나온 것은 맞소. 하지만 나는 여기서 하루종일 앉아 있으며 햇빛을 쬐고, 사람들을 만나고, 안부를 묻고 대화하며 하루를 사는 거요. 지금 다 팔면 나는 내 인생을 살 수 없소”
한국에서의 인생은 남보다 더 많이 팔아야 하고, 더 빨리 팔아야 하고, 더 많은 여유를 가져야 성공한 것으로 자타가 공인한다.
심지어 영혼을 살리고 영혼을 양육하는 목회마저도.
그리고 나도 부지불식중 그렇게 영향을 받았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 내가 어려운 내용도 아닌 이 대목에서 진도를 더 나가지 못하고 한참을 머물러 있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무엇을 내 인생으로 여기고 있는가?’
‘나는 내 인생을 누리고 있는가?’
‘나는 목사로서 성도에게 획일적인 신앙의 형태를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목사인 나도 내 인생을 제대로 발견하지도, 누리지도 못했으니 성도들에게 각자의 인생을 발견하고 살아가도록 이끌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이 대목을 통해 작은 일상과 순간순간이 내가 의미없이 흘려 보내지 말아야 할 소중한 나의 인생이며, 하나님이 주시고 내가 누려야 할 복인 것을 깨달았다.
복을 복으로 알지도 못하고 누리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다음을 위한 준비과정으로 여기고 많은 날들을 보낸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나는 그 때 소위 ‘성공적 목회’라는 틀을 버린 것 같다.
성도들과 함께 종교적 바벨탑을 만들 필요가 전혀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성도들도 각자의 영역에서 그냥 행복하게 살면 된다.
무엇을 열심히 하지 않아도, 무엇을 이루지 못해도, 남들이 인정하지 않아도, 굳이 인정받을 필요도 없는 내 인생은 그냥 자체로 소중하고 귀하다는 생각으로 살게 됐다.
다른 사람들도, 나의 자녀들의 인생도 그렇게 보게 됐다.
나는 이 책을 추천도서로 하기도 했고, 제자훈련 프로그램에서는 독후감을 쓰도록 했다.
그런데 이런 방향으로 독후감을 쓴 사람이 기억나지 않는다.
심지어 다른 과제는 아주 잘 하던 어떤 분이 “목사님, 왜 이 책을 읽으라고 하신 거예요? 이해가 되지 않아 독후감을 쓸 수가 없었어요”라고 한 적도 있다.
“하하, 그런가요, 그럼 어쩔 수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