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어느 성도의 전화를 받았다.
“목사님, 아흔이 넘은 부친이 거동도 못하고 계시는데 의식이 희미해지기 전에 복음에 대해 확실히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부친께서 교회에 다니신 적은 없으십니까?”
“가족의 권유로 몇 번 다니신 적은 있지만 귀가 어둡기도 하셔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하셨습니다”
“아…연세 많으신 분이 교회에 처음 오셨을 때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거동을 못하시고는 그냥 말씀을 들을 기회도 전혀 없습니다. 가끔씩 기독교 TV를 틀어드리지만 이내 채널을 돌려 뉴스만 보십니다. 벌써 2년이 되었네요. 목사님이 복음을 전해주시고 함께 예배를 드릴 수도 있으면 좋겠습니다”
“예, 당연히 그래야죠”
그 성도와 함께 그 어르신의 거처를 찾았다.
어르신은 혼자 몸을 일으키지 못할 정도로 약해진 상태로 침상에 누워 계셨고,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아들과 며느리가 인사를 하자 눈을 떠 반가운 표정으로 맞았다.
아들이 나를 소개했다.
나는 침상 가까이 가서 인사를 했다.
“OOO 어르신, 처음 뵙겠습니다”
연락을 받았을 때 부친의 성함을 알려달라고 해서 그동안 그 이름을 불러가며 기도했기에 초면에 이렇게 인사할 수 있었다.
어르신이 누운 상태라 시선을 맞추기 위해 나는 침대 곁에 조금 허리를 숙이는 자세를 취했다.
“어르신, 교회에 다녀보신 적 있으시죠?”
“예”
“내용을 잘 듣고 이해를 하셨습니까?”
“잘 들리지도 않고 이해를 못했습니다”
“제가 오늘 기독교 신앙을 쉽게 설명드리러 왔습니다. 잘 들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
그렇게 복음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교회에 가면 모두가 ‘죄인’이라고 하지요?”
“예”
“‘죄인’이란 소리를 들을 때 기분이 어떠셨어요?”
“별로 좋지 않지요”
“예, 그러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말하는 ‘죄인’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도둑질하고, 간음하고, 사기치고, 살인하는 그런 죄인이 아닙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저에게 자녀가 있는데 제가 매월 초에 용돈을 줍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감사합니다, 아빠”가 아니라 “감사합니다, 아저씨”하면 제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좋지 않지요”
“왜일까요? 감사하다고 했는데”
“‘아버지’에게 ‘아저씨’라고 했으니까요”
감사하게도 어르신이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셨다.
“예, 맞습니다.
심지어 절을 하면서 감사하다고 해도 ‘아저씨’라고 했기 때문에 제가 서운함을 넘어서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고 마음이 아팠을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이 되는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큰 죄이지요.
바로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죄의 근원입니다”
“음…”
“교회에 가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근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도 지으셨기에 사람의 ‘아버지’가 되시고, 당연히 ‘아버지’라고 부름받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외면합니다.
성경은 바로 이것을 ‘죄’라고 합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지 않는 것은 천륜을 저버린 큰 죄가 아니겠습니까?
바로 여기에서 세상적인 다른 모든 죄들도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군요”
“이제 ‘죄인’이라는 것 아시겠죠?”
“예”
드디어 ‘예수님’ 이야기를 할 타이밍이 왔다.
“이 죄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감당해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들어보셨지요?”
“예”
“이 예수님 덕분에 우리가 다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 의지한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군요”
“혹시 여기까지 이해되지 않는 것 있으세요?”
“없어요”이제 ‘천국’ 이야기를 할 때입니다.
“천국에 가고 싶으세요?”
“예”
“천국 문의 열쇠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니 어김이 없이 다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이 성경의 1부인 구약과 2부인 신약에 공통적으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부르는 자가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 단순한 일이 구원의 방법이 되는지 이어서 설명했다.
“너무 쉽죠?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성경을 읽어 이해하고, 덕을 쌓아야 천국에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세상에는 밀림에서 옷도 입지 않고 지내는 원주민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문명화가 되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 사람들도 그냥 그런 상태에서도 천국에 갈 수 있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너무도 쉬운 구원의 방법을 열어 주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이해 되세요?”
“예”
“어르신도 구원받고 싶으세요?”
“예”
“그럼 구원을 받는 일에 예수님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한 번 불러 보시겠어요?”
어르신은 의식은 또렷하지만 말을 하는 것은 조금 힘겨운 상태였다.
비록 분명하지 않은 발음이지만 내 귀에는 분명 그 이름이 들렸다.
“예수님”
옆에서 마음 졸이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모든 광경을 지켜 보던 아들과 며느리의 입에서 “아멘”이 나왔다.
저는 한 번 더 질문했다.
“천국 문의 열쇠가 뭐라고요?”
“예수님”
침상에 오래 누워있는 어르신으로서는 힘을 다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 것이다.
“어르신, 아주 잘하셨습니다.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가르쳐 준다고 쉽게 따라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게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어르신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
“주의할 것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특별히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지 못한 것처럼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그 마음에 하나님의 영을 보내주신다고 했습니다.
이제 마음이 어려워질 때 마음 한 편에서 ‘그래도 나는 예수님을 믿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예수님, 도와주세요’라는 마음이 들게 될 것입니다.
이후로 혼자 계실 때에 마음이 어려우면 그 때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어려울 때 어떻게 하셔야 한다구요?”
“예수님”
“예, 맞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껄끄러운 ‘죽음’에 대해 언급했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 두려우시죠?”
어르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생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육신의 인생을 마치고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히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사는 관문입니다.
마치 상급학교에 진학하거나 취업을 하기 위해 학교를 졸업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졸업이 정든 학교나 친구들과 헤어지는 아쉬움이 있지만 한 기간을 매듭짓고 새로운 기간을 여는 의식인 것처럼 죽음도 그렇습니다”
이 이야기를 할 때 어르신은 좀 새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또 다시 질문했다.
“천국의 열쇠가 뭐라고요?”
“예수님”
‘예수님’의 이름이 어르신의 마음에 잘 새겨진 것 같았다.
나는 이제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배하자고 했다.
찬송가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선곡했다.
이 찬송의 작사자 존 뉴튼과 배경을 소개했다.
그리고 4절까지 불렀다.
이어 요한복음 14장 1절부터 3절까지의 말씀을 읽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어르신,
이건 예수님의 말씀인데, 예수님이 만약 천국에 우리가 있을 곳이 없으면 솔직히 말씀하셨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천국에는 있을 곳이 많답니다.
그리고 지금 예수님은 우리가 있을 거처를 짓고 계신다고 합니다.
다 지으면 우리를 데리러 오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천국에서 OOO 어르신을 위한 집을 짓고 계십니다.
만약 어르신을 위한 천국의 집이 다 준비되면, 예수님이 오셔서 어르신의 이름을 부르며 “OOO, 천국에 집 다 지어 놓았으니 이제 가자”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 때 어떻게 하시겠어요?”
“같이 가야죠”
이 때는 전혀 아프지 않은 사람처럼 대답하셔서 나도 조금 놀랐는데, 아들과 며느리는 ‘아멘’을 연발했다.
“그럼요.
아들 며느리에게 ‘바이바이, 나중에 천국에서 만나자’하시고 하나님 아버지에게 가시는 겁니다. 좋으시죠?”
“예”
“죽음은 이런 겁니다. 이제 죽음이 두렵지 않으시죠?”
“예”
감사하게도 어르신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들과 며느리는 곁에서 ‘아멘’했다.
아흔이 넘은 어르신이 복음을 제대로 듣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 후 드린 첫 예배가 이렇게 마쳤다.
“어르신, 오늘 초면에 외람되지만 여러 말씀 드렸는데 잘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뵙겠습니다”
그 어르신이나 아들과 며느리에게도 감격적인 순간이지만, 복음을 전한 나에게도 아주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누워계신 분과 시선을 맞추느라 앉지 않고 허리를 약간 숙인 채 한 시간 가량 복음을 전하고 예배를 드린 덕분에 나중에는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지만, 그 방을 나올 때에는 그 통증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마음에 즐거움이 있었다.
한 사람에게 진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한 일인데, 그분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목사는 전문적인 신학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는 일은 모든 성도가 해야 하는 일이지만 혹시 기독교나 성경에 대한 오해가 전제된 질문에도 잘 대답할 수 있도록 준비된 사람이 목사이다.
목사는 목사의 본분인 복음을 전할 때 가장 행복하다.
목회의 본질인 복음을 전할 때 가슴이 뛴다.
성도님들에게 설교할 때도 참 좋지만,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만나 복음을 전하는 것은 또 다른 설렘과 은혜가 있다.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뻐한다(눅 15:7)’고 했다.
이 하늘의 기쁨을 이 땅에서 맛보며 사는 것이 목사의 가장 큰 행복이요 은혜이다.
이 맛으로 산다.
계속 ‘예수의 심장(빌 1:8)’으로 내 가슴이 뛰는 걸 느끼며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