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말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고등학교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신욱아, 우리 동기 OO가 말기암이란다.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인데 네가 목사니까 한번 만나주면 좋겠다.” 얼굴도 알고, 이름도 기억났다. 학교 다니면서 한 번도 말을 섞지 않았던 동기였지만 목사로서 마지막 가는 길을 인도해 주고 싶었다.
당시 나는 감기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런 몸으로 갈 수 없다 싶어 한 주간을 미뤘다. 그 한 주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그 동기는 세상을 떠났다. 온전한 건강은 아니었지만 빈소를 찾았다. 영정사진으로 친구를 대하려니 너무 미안했다. 복음을 들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내가 무산시킨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빈소에서 목회하느라 30년간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을 만났다. 대부분 고등학교 때 그 얼굴 그대로라 세월을 넘어 기억할 수 있었다. 아는 친구가 모르는 친구에게 나를 소개했다. “목사님이셔.” 친구들이 서로 술잔을 기울이다가 내게도 잔을 건넸다. “아, 목사님이니까 술을 안드시지.” “야, 나는 여기 목사로 온 것이 아니라 친구로 왔다. 말 편하게 해라.”
나는 궁금해서 물었다. “니네들 중에 교회 다니는 사람있냐?” 아무도 없었다. 40대 후반이면 아내를 따라서라도 교회에 다녀보기라도 할 것 같은데. 문득 ‘이 친구들에게는 누가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궁금했다. 길거리에서 뿌려지는 전도지는 읽기는 고사하고 받지도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돌아오는 길에 고민에 빠졌다.
‘나는 20년간 열심히 목회했는데, 내 친구들은 무엇을 하고 있나?’
‘지난 30년간 친구들을 위해 기도한다면서도 그들을 만나지는 않았다.’
‘내가 목사로서 잘 하고 있는 것인가?’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안주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교회라는 울타리 바깥으로 나가기 꺼려하는 나를 발견했다. 교회라는 울타리 바깥에 거의 신경을 쓰지 못하는 나를 봤다.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도 가기를 원한다고 노래했는데, 예수님은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길을 떠나신다 했는데, 성령님이 그렇게 내 마음을 두드리셨는데, 나는 외면하고 있었다. 성경의 비유에는 울타리 안에 아흔아홉 마리의 양이 있지만 한국의 현실은 울타리 바깥에 아흔 마리의 양이 있다. 목사들은 울타리 바깥이 두려워 잃은 양을 찾아 나가려 하지 않는다.
이제라도 내 시선이 울타리 바깥을 향한 것이 진정 감사하다. 지난 20년간 울타리 안을 지향했다면 남은 20년은 울타리 바깥을 지향하련다. 담임목사를 사임하니 친구들이 묻는다. “헌금하면 목사가 다 갖는거냐?” “성경은 사람이 기록했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되냐?”
‘이런 걸 궁금해 하고 있었구나.’
‘그런데 차마 묻지 못하고 있었구나.’
‘울타리가 너무 높게 느껴졌구나.’
쉽게 안을 들여다 보고 궁금한 것을 풀 수 있고
쉽게 안으로 들어와 안전하게 거할 수 있는
울타리 바깥 양들을 위한 ‘낮은울타리’가 되고 싶다.
목사 강신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