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신자 2명과 성경공부(10) – 계시록 13:10-18

“10절에 성도는 세상 사는 동안 사로잡히기도 하고 칼에 죽기도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기독교 신자라는 이유로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당하는 것은 이미 정해진 길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가는 곳에는 늘 핍박이 따라다닌 것 아시지요?”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세상의 박해에 대한 성도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10절 마지막에 있는 대로 ‘인내와 믿음’입니다. 핍박을 받을 때 성도는 인내해야 하는데 성도에게 믿음이 있어야 오랜 세월 인내할 수 있고, 성도는 인내함으로 자신의 믿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를 바라보던 그들의 표정이 진지해지는 건 나만 볼 수 있었다.

“11절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온다고 합니다. 아까 첫번째 짐승은 어디에서 나왔죠?”
“바다요”
“바다는 무슨 의미라고 했죠?”
“혼란? 깊음?”
“그럼 땅은 어떤 의미일까요?”
“혼란하지 않은 것?”
“예, 바다는 발이 닿지 않지만 땅은 발이 닿죠. 두번째 짐승의 배경이 첫번째 짐승만큼 혼란스럽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다는 전세계를 덮는 질서가 아직 생기기 전이라면 땅은 이제 세상이 어느 정도 합의된 질서가 있다는 말이겠지요. 두번째 짐승도 뿔이 있습니다. 뿔은 무엇을 상징한다고 했죠?”
“능력요”
“첫번째 짐승은 뿔이 몇 개라고 했죠?”
“열 개요”
“두번째 짐승은 뿔이 몇 개입니까?”
“두 개요”
“그럼 누가 능력이 많은가요?”
“첫번째 짐승요”
“두번째 짐승은 첫번째 짐승만큼 사람을 굴복시킬 강력한 제국이나 시스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신 용처럼 말을 한다고 했습니다. 용은 옛 뱀인데 무슨 말을 했나요?”
“사람을 유혹하는 말이요”
“예, 에덴동산에서 뿐 아니라 사람을 유혹해서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말을 합니다. 그 말은 사람에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들려서 상당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와가 그랬듯이 사람이 유혹당하는 것입니다”

“두번째 짐승은 사람들을 유혹해서 첫번째 짐승을 섬기게 합니다. 아주 옛날에는 하늘로 높이 올라가는 바벨탑을 원했었다면 이후로는 온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대제국이 세상의 소망이라는 거죠. 세상을 하나로 만들어줄 시스템이 있으면 세상에 평화가 찾아올 것처럼 믿게 합니다. 그 이면에 무엇이 있는가? 바로 인간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르네상스가 있었습니다. 문예부흥이라고 하지만 인간의 지성의 탁월함과 심미안을 스스로 높일 뿐 아니라 심지어 신도 인간의 시각으로 판단하는 인본주의 가치관을 온세상에 심었습니다. 옛날 그리스의 철학과 로마의 방식이 옳았다는 것이죠. 성경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지 않고 인간의 시각으로 판단하는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쪽으로는 이성과 합리를 강조하면서 다른 한쪽으로는 미신과 초자연적인 쪽으로 몰아갑니다. 13절과 14절에 ‘이적을 행한다’는 말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마귀의 힘을 빌어 진짜 기적을 행하기도 하고, 과학의 힘으로 옛날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들을 해내기도 합니다. 신들이 있다고 생각했던 하늘보다 높은 우주에 지금은 로케트가 올라가고 수 만 개의 인공위성이 떠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기 어려운 분위기가 되는거죠. 대신 사람들은 무엇을 믿겠습니까?”
“과학의 힘?”
“그런 것이 될 수도 있겠지요. 지금 가상현실이나 증강현실 기술이 사이버공간을 현실로 끌어오고 있는데, 나중에는 우리가 직접 보고 있는 것도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을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15절에 제국이나 시스템에서 파생된 그 무엇이 인간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 말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유지하는데 아주 중요한 가치라며 그것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라 말합니다. 그러면서 666이 나옵니다. 중요한 것은 666은 지금이나 미래의 어느 시점에 어떤 흉측한 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계시록에 쓰여지는 고대사회에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18절에서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고 말합니다. 지금 확인해 보라는 말이지요. 16절에 ‘자유인들이나 종들이나’라고 했는데 이건 신분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13장 마지막에서 짐승들이 하는 짓은 나중에 언젠가 나타날 말세의 일이 아니라 고대에도, 중세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있었고 있으며 있을 일입니다”

“그럼 666이 뭔가요?”
“옛날 우리나라 사람들이 한자 ‘죽을사’자를 싫어해서 숫자 4를 싫어하는 것처럼 666 자체가 저주받은 숫자라서 써도 안되고 입에 올려도 안되는 그런 게 아닙니다. 그냥 상징적인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는 666이 바코드라고 해서 바코드가 찍힌 건 사지 말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신용카드 사용이 갑자기 늘기 시작했을 때는 신용카드가 없으면 매매가 어려우니까 신용카드가 666이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나중에는 베리칩이 666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고대나 중세 사람들은 바코드도 없고 신용카드도 없고 베리칩도 없으니 666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는 거네요?”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그래서 그런 해석이 문제입니다. 실은 중요한 것은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한다는 것이죠. 당시로 오른손은 행동이고 이마는 의식을 말합니다. 뇌과학적으로 보면 전두엽보다 앞에 있는 전전두엽은 인간의 가치관을 담당한다고 합니다. 바로 이마 뒤편이죠. 계시록 13장은 인류종말의 미래의 일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미래나 성경에 반하고 인본주의적 가치관을 가지고 그대로 행동하며 살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아주 단순한 메시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때 당시 사람들도 이걸 보고 ‘예수님 잘 믿어야 되겠구나’ 할 수 있었겠지요. 사도 요한이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려고 쓴 글이 아니라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도 이걸 읽으면 결론이 ‘예수님 잘 믿어야 되겠구나’ 이렇게 나와야 정상입니다”

“구원받는 사람들도 표가 있습니다. 어떤 표를 어디에 받을까요? 이것이 다음에 공부할 14장에 나옵니다”
“666이 어떤 표가 아니라면서요? 그런데 구원받는 사람들은 따로 표가 있나요?”
“자세한 것은 다음 시간에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