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시즌2] (6)창26:26-31

“이삭이 브엘세바에 있을 때 팔레스타인 왕 아비멜렉이 군대장관과 함께 찾아와서 계약을 맺습니다. 이 장면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으세요?”
“어, 그러네요. 전에 이 이야기가 나왔던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정말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바로 이삭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이 팔레스타인에서 겪었던 일입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아내와 관련된 일을 겪고 나중에 계약을 맺었는데, 아들 이삭도 아내와 관련된 일을 겪고 나중에 계약을 맺습니다. 나그네 인생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거죠. 그런 나그네 설움을 당하면 어디를 그리워할까요?”
“고향이겠지요.”
“그렇죠. 그런 설움을 전혀 당할 가능성도 없는 고향이 그리울 겁니다. 그래서 저 뒤쪽 신약성경에는 ‘영원한 고향’을 그리워한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영원한 고향’이 어디일까요?”
“천당?”
“예,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도 천당을 그리워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세상의 실력자가 인정해 주고 대등한 입장에서 계약을 맺는 위로도 가끔 받습니다. 사실 이런 이벤트가 없으면 세상 살 맛이 없죠. 하나님도 아시니까 가끔씩 이벤트를 해 주십니다. 이건 아브라함이나 이삭이 이렇게 해달라고 원한 게 아닙니다.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요. 팔레스타인의 왕인 아비멜렉이 자발적으로 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그렇게 하도록 하셨지요. 팔레스타인 왕이 이삭에게 서로 해치지 말자는 계약을 맺으러 올 때 이삭이 한 마디를 합니다.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에게 너희를 떠나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말에 뼈가 있지요?”
“이삭이 뒤끝이 있네요.”
“그럼요. 이 말을 보면 앞에서 이삭이 팔레스타인 땅을 떠나거나 우물을 빼앗길 때 성품이 너무 너그럽고 온화해서 그냥 내준 것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습니다. 성벽의 보호를 받으며 오래 살았는데 힘으로 나가라고 하니 억지로 나간 것이고, 우물을 빼앗기고 싶지 않지만 힘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빼앗겨 속이 많이 상한 겁니다. 이런 것을 보면 아버지 아브라함과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에 살던 롯이 포로로 잡혀 갔을 때 수백 킬로미터를 쫓아가서 도시국가 연합군을 기습했던 것 기억하시죠?”
“예.”
“이삭이 만약 그런 경우라면 아브라함처럼 했을까요?”
“못했을 것 같아요.”
“믿음의 조상이라고 해서 아브라함같이 진취적이고 외향적이고 나아가 쟁취하는 스타일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이삭처럼 소극적이고 내향적이고 혼자서 속을 썩이는 스타일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성향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세요?”
“음… 우리는 아브라함 같아요.”
나의 바로 왼편에 앉은 분이 같은 쪽에 앉은 사람을 가리키며 먼저 입을 뗐다.
“동의하세요?”
나는 같은 쪽에 앉은 분께 물었다.
“예, 그런 것 같아요.”
“그럼 이쪽 분들은요?”
“이삭 스타일 같습니다.”
오른편에 앉은 분들은 아무 말을 하지 않는데 아브라함 스타일이라고 한 분이 대답했다.
“맞는 것 같습니다.”
역시 아브라함 스타일의 다른 분이 동의했다.
“동의하세요?”
내가 오른편에 앉은 분들에게 질문했다.
“맞아요, 이삭 맞다니까요.”
아브라함 스타일이 먼저 대답했다.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이삭 스타일도 어렵게 긍정했다.
“ㅎㅎ 정말 이삭 스타일 맞는 것 같습니다. 지금 제가 아브라함 스타일, 이삭 스타일을 말씀드린 건 그냥 재미로 한 게 아닙니다. 여기에도 의미가 있는데요. 우리 사람들은 한 가지 스타일이 없습니다. 아주 다양하죠. 아브라함 스타일도 있고, 이삭 스타일도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부러워할 수도 있고, 답답하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똑같이 대하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을 스타일이 전혀 다른 이삭에게도 똑같이 하십니다. 그러니까 스타일이 좋아서, 하나님 마음에 들어서 복을 더 받는 건 없습니다. 사람이 생각하기에 열심이 있고 적극적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더 받을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차별없이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요즘 저를 사랑하시지 않는 것 같아요.”
아브라함 스타일의 한 분이 말했다.
사업이 될 듯 될 듯하지만 뚫리지 않아 좀 답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걸 안다.
“목사님, 사실 OO가 요즘 많이 힘들어요. 다음 모임까지 붙잡을 수 있는 말씀을 좀 주세요.”
이삭 스타일의 사람은 힘든 사정을 꺼내지 못하는데, 아브라함 스타일의 사람이 대신 말해주었다.
나는 갑작스런 요청에 조금 당황했지만, 분위기가 어색한 농담을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아니에요, 갑자기 그러면 목사님이 부담 가지시잖아요.”라고 말리지 않고 다들 가만히 내 말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순간 내 시선이 31절 마지막 ‘그들이 평안히 갔더라.’에 머물렀다.
“31절 마지막을 봐주시겠어요?”
나는 모니터에 31절을 확대해서 ‘그들이 평안히 갔더라.’가 잘 보이게 했다.
“다들 많이 힘드신 것 같은데, 다음 모임까지 이 말씀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들이 평안히 갔더라.’ 여러분들도 하나님께서 인생길을 평안히 가실 수 있도록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아~ 목사님, 정말 필요한 말씀 같아요. OO에게 정말 위로와 힘이 될 것 같네요.”
이삭 스타일은 여전히 말이 없고, 아브라함 스타일이 대신 대답했다.
“제가 기도해 드려도 될까요?”
“예. 좋죠. 기도해 주세요.”
이 대답은 어느 스타일이 했을까?
역시 아브라함 스타일이었다.
나는 평안을 비는 기도를 했고, 이들은 ‘아멘’했다.
이삭 스타일의 두 분이 ‘아멘’은 소리내어 한 것이 감사했다.
그만큼 평안이 절박하다는 뜻이기에 ‘아멘’이라고 한 두 분에게 하나님이 평안을 주시길 속으로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