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여 전 60대 후반 남자 비신자 두 명과 낮은울타리에서 만났다.
두 시간 가까이 대화했는데 솔직히 너무 힘든 시간이었다.
솔직히 그분들이 다시 만나고 싶어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분들이 주기적으로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내가 매일 그분들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긴 했지만 또한 그분들을 소개한 분이 적극적으로 모임을 권했다는 걸 안다.
비록 격월이지만 다시 만나기로 한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오늘 오후 그분들을 다시 만났다.
구체적으로 나이와 사시는 곳을 물었다.
두 분 모두 일흔인데, 한 분은 경남 함안, 한 분은 김해 장유에서 사진다고 했다.
주말이라 정체가 심한데 그 먼 곳에서 오신 것이다.
그 사정을 듣고 멀리 와주셔서 감사하다고 했다.
한 분이 “목사님, 혹시 성경에 생명과 죽음에 대한 말씀 없습니까? 그런 말씀이 있으면 설명 좀 해주십시오.”라고 했다.
“그렇다면 공부방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모니터에 패드를 연결하며 질문했다.
“기독교에서 ‘영생’을 말하는데, ‘영생’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영원히 사는 것 아닙니까?”
“보통 그렇게들 생각하시고, 기독교인들도 단순히 영원히 사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엄밀히 기독교가 말하는 ‘영생’은 다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나는 요한복음 17장 3절 말씀을 화면에 띄웠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나는 영생, 하나님의 창조, 에덴동산, 아담과 하와, 선악과, 죄, 죽음, 예수님, 십자가, 구원에 대해 말했다.
질문하신 분이 “이제 개념이 좀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라고 반응했다.
다른 분은 아메리카를 개척할 때 청교도가 인디언을 학살한 이야기, 선교사가 식민지 개척의 앞잡이 노릇을 한 이야기 등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며 기독교가 다른 종교 또는 다른 민족들과 사이좋게 지내지 못한 경우를 거론했다.
나는 역사적으로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바른 사실로 교정할 것은 교정했다.
또한 로마서 12장 후반부의 말씀을 찾아보이며 기독교인이 타종교인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기독교인들끼리만 어울리려 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태도라고 했다.
오히려 성경은 적극적으로 비기독교인 이웃들과도 평화롭게 지낼 것을 말하고 있다고 했다.
“성경이나 인생에 대해 목사님에게 이렇게 물을 수 있으니 참 좋고, 목사님이 우리가 이해하도록 차분하게 설명을 해주시니 참 좋네요.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의 만남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기에 감사하다는 기도를 드리고 마쳤는데, 낮은울타리를 떠나시며 위와 같은 이야기를 하셨다.
지난 번처럼 내가 지칠까봐 염려했었는데 무사히 잘 마쳐서 감사했다.
감사기도를 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