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기도원에 다녀왔다.
며칠 집을 떠나면 늘 노트북과 패드를 챙겼는데 이번엔 아예 가져가질 않았다.
신체의 일부처럼 휴대했던 스마트폰도 그곳에서는 꺼놓았다.
가족에게는 내가 어디에 간다고 말하고 비상연락처도 알려두었다.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대선이 있었고 결과를 알고 싶었지만 사전투표를 한 것으로 관심을 껐다.
그만큼 이번 기간이 내게 간절했는지도 모른다.
목요일 오후에 휴대폰을 켜니 수십 통의 전화와 수십 통의 문자가 와있었다.
대부분 일상의 연락이었고 바로 답하지 않아도 될만한 연락이었다.
그중 바로 전화를 하고 답을 한 연락은 고교 친구의 연락이었다.
전화와 문자를 여러번 남겼다.
인생의 큰 굴곡을 겪었던 친구는 혹시 내가 힘들어서 잠적한 줄 알고 염려하는 마음이었던 것이다.
나와 성경공부를 했던 자기 부인에게도, 성경공부를 같이했던 다른 멤버에게도, 심지어 아는 목사님에게까지 연락을 해서 그분들도 모두 메시지를 남겼다.
내 연락을 받은 친구는 안도하며 몇 번이나 다행이라고 했다.
나를 그토록 염려해주는 친구가 참 고마웠다.
멀고 익숙하지 않은 수양관은 내게 고립감을 주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상쾌한 자연 속에서 닭과 개가 짖는 소리를 들으며 시골길을 달리기도 했지만 긴장한 탓인지 시원한 느낌이 없었다.
중간에 ‘그만 내려갈까?’라는 생각도 몇 번 들었지만 참았다.
목사인 나도 기도원에 가면 처음부터 소위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다.
프로그램, 찬양, 설교, 진행 등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내려놓는 것이 은혜를 받는 것의 첫 단추이다.
사실 가장 힘든 것은 같이 방을 쓰는 분의 코골이였다.
소음기가 터진 오토바이처럼 소리 자체도 이제까지 내가 들어본 코골이 중에 가장 컸지만, 더 힘들게 만든 것은 무호흡 증상이었다.
귀마개를 해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늦게 잠들었지만 새벽에 나가서 달리기를 했다.
둘째날 밤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차에 가서 자기로 했다.
긴 옷을 챙겨입었음에도 산속 밤공기는 너무 찼다.
체온을 위해 웅크리고 잠을 청해봤지만 한겨울에나 느낄만한 추위로 몸이 떨려서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틀 동안 잠을 설쳤더니 다크써클이 크고 깊게 생겨 선글라스를 쓴 것 같았다.
셋째날에 옆방에 빈 자리가 생겨 옮겼지만 그 방에도 코골이가 있었다.
그래도 원래 있던 방 보다는 견딜만 해서 그나마 잠을 좀 잔 것 같다.
은혜는 고난 중에 온다.
그 와중에 나는 주님을 만났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예수님의 눈을 보았다.
그 눈은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엉엉 울었다.
순간 나는 한 말씀이 떠올랐다.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세기 6:8)
그러나 나는 이 말씀의 영어 번역이 히브리어 더 원문에 가깝다는 걸 알고 있다.
"Noah found favor in the eyes of the LORD"(NIV)
노아가 하나님의 눈에서 자비를 보았다는 뜻이다.
노아는 아무리 하나님의 명령이라지만 어떻게 긴 세월동안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결국 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었다.
노아가 사람들의 몰이해 속에서도 오랫동안 방주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눈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매일 아침 하나님의 눈을 기억했을 것이며, 힘들 때마다 하나님의 눈에서 자비를 보았던 경험을 떠올렸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성경의 사건에 대해 이해가 되었다.
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6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27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마태복음 14:25-29)
베드로는 자신과 눈을 마주쳐주셨던 예수님의 눈을 바라볼 때 무서운 바다가 보이지 않았고 휘몰아치던 바람이 더 이상 방해가 되지 않았다.
오직 예수님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확신이 그를 물 위로 뛰어들게 만들었고, 예수님은 그가 물 위로 걷게 만들어주셨다.
집으로 돌아온 다음날 아침 나는 마치 꿈에서 깬 것 같았다.
그러나 오히려 침대에 누운 나 자신보다 더 생시처럼 느껴진 것은 예수님의 눈을 본 그 때의 느낌이었다.
나는 다시 눈물을 흘렸다.
‘신앙의 선배들이 그래서 그 길을 갈 수 있었구나.’라고 생각했다.
‘나도 이 길을 갈 수 있겠구나.’라는 믿음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