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데살로니가전서 성경공부를 마쳤다.
성경공부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의견을 물었을 때 데살로니가후서가 석 장밖에 되지 않으니 데살로니가후서까지 끝내면 좋겠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래서 10시에 모여 데살로니가후서 첫 시간 공부를 했다.
새로운 카메라와 전에 없던 마이크를 설치하느라 시간이 좀 걸려서 늦게 시작했지만, 화면에 마이크가 나오니까 뭔가 더 갖춰진 느낌이 들긴 했다.
예배 때에도 카메라와 마이크를 옮겨 설치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
그동안 포차 사장님이 도착했는데 점심 식사 반찬으로 감자샐러드를 푸짐하게 해왔다.
청년 한 명이 직장 일 때문에 참석하지 못한다고 했다.
밥 맡은 성도가 한 명 분을 뺀다는 것이 오히려 한 명 분을 더해 나중에 알고 보니 밥솥에 밥이 가득하게 됐다.
시편 읽기 본문이 시편 제88편이었는데, 표제어에 ‘마할랏르안놋’이 있었다.
‘질병’이란 의미인데, 설교 본문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장면이었기 때문에 묘한 상관관계가 있어 유익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과는 달리 요한복음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내용이 한 단락에서 언급되지 않고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심문하는 본문을 사이에 두고 나눠져 있다.
누가복음에 두 번째 부인과 세 번째 부인 사이에 한 시간 후라는 언급이 있지만, 요한복음은 편집으로 그 시간적 간격을 충분히 나타냈다.
이런 것을 알고 성경을 읽으면 훨씬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설교제목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싶을 때’였다.
살다 보면 우리가 연약해서 여러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든, 혼자 있을 때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정도가 아니더라도 슬쩍 모르는 척 정도 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평소와는 달리 설교 시간에 ‘그런 경우가 없었나요?’식으로 질문을 많이 했다.
베드로가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그의 눈을 쳐다보셨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에게 회복의 씨앗으로 주신 가장 보편적인 것과 말씀과 기도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기도인데, 말씀으로 깨닫더라고 기도하지 않으면 무익하기 때문이다.
다음 주에는 청년 한 명이 토익 시험을 보느라 참석을 못한다고 했다.
마침 이 청년이 영상 담당이라 다음 주에는 성경공부를 한 주 쉬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