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때 친구(2)

“그런데 기독교는 너무 ‘하라’, ‘하지 말라’가 많고 강압적인 것 같아. 꼭 그렇게 해야만 되냐?”
“이게 복잡한 배경이 있는데, 성경에 ‘율법’이란 게 있거든. 혹시 들어봤니?”
“아니.”
“십계명은?”
“들어봤지.”
“아주 오랜 옛날에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노예로 수백 년 생활했어. 노예는 가축이나 물건같은 취급을 받았으니 인간이하였지.”
“그렇지.”
“그런데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그 노예들을 해방시키셨거든. 그리고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어. 당시 신분사회에서 법에 대한 권리와 의무를 가진 것은 일반 시민들이었거든. 이스라엘은 노예였으니까 한 번도 해당사항이 없었지. 그런데 ‘하라’, ‘하지 말라’를 기록한 ‘십계명’을 받은 거야. 다른 조항들도 있었는데 그걸 ‘율법’이라고 해.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하라’, ‘하지 말라’를 당했을 때 기분이 어땠을까?”
“나쁘지 않았겠는데.”
“그렇지. 자신들을 노예로 취급하지 않고 시민으로 취급한다는 것이니까. 그것도 하나님이 말이야. 그래서 그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지키는 것을 자긍심으로 삼은 거야. 그런데 그 자긍심이 너무 지나쳐 버린 거지. 하나님이 십계명을 주시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왜 십계명을 주냐면’하고 그 이유를 먼저 말씀하셨거든. 그건 이스라엘이 마치 목사처럼 먼저 하나님 법을 잘 배우고 실천해서 다른 민족들에게도 전하라는 것이었어. 그런데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법을 받은 자기들만 높이고 다른 민족들을 완전 아래로 본 거야.”
“그럼 안되지. 종교는 그러면 안되는 거잖아.”
“그래. 하지만 유대교는 그렇게 했어. 게다가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잘 지키려면…’ 하면서 시행세칙을 훨씬 더 많이 만들었어. 그리고 백성들이 그것을 지키도록 강요했지.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이유가 그게 아니다. 너희들은 왜 하나님의 의도를 무시하고 백성들을 못살게 구느냐?’고 반박한 거야. 그러니 권위를 무시당한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미워해서 결국 십자가에 죽인 거야.”
“그러니까 ‘하라’, ‘하지 말라’로 강압하는 건 하나님의 뜻이 아니구나.”
“그럼. 그런데 이것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좀 왜곡된 면이 있어.”
“뭐가?”
“우리나라는 원래 유교가 심하잖아.”
“그렇지. 유교 배경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거야. 유교도 ‘하라’, ‘하지 말라’가 많은데 거기에 성경에 있는 내용까지 그대로 ‘하라’, ‘하지 말라’를 하니 강압적으로 보일 수밖에.”
“우리나라는 유교 배경이 너무 세서 다른 종교도 좀 그런 것 같아.”
“안타깝게도 일부 기독교인 중에 옛날 유대인처럼 예수님 믿지 않고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을 곧 지옥 갈 운명으로 정해진 사람처럼 대하는 경우가 있어.”
“어, 맞아. 정말 기분이 좋지 않더라고. 그런데 그게 잘못인 거구나.”
“그러지. 그 사람이 지금은 그렇게 보이지만 나중에라도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건데, 한 번 전도하고 지금 자기 말을 듣지 않았다고 지옥 갈 사람으로 정해버리는 건 잘못된 태도야.”
“그러니까 기독교도 다른 사람들에게 잘 대하라고 가르치는 게 맞는 거구나.”
“그렇지. 다같이 사는 사회에서 잘 대해야지. 대부분 교회에서는 사실 그렇게 가르치고 있어. 일부 과격한 사람들이 문제가 되서 그렇지.”
“신욱아, 나 이런 이야기 처음 듣는다. 네가 이런 이야기를 해줘서 너무 고맙다.”